“질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기록을 깼다는 거 아세요? 미국이 지금 당신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아세요?”(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하지만 아직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코리 부커 민주당 상원의원)
1일 오후 7시 19분, 부커 의원이 기존 역대 최장 상원의원 연설 기록인 24시간 18분을 돌파하자 미 워싱턴 DC 의회 상원 본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민주당 의원들과 청중들이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부커 의원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잠시 발언을 멈추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미국 워싱턴 DC 의회에서 민주당 코리 부커(뉴저지) 상원의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마라톤 연설’을 24시간 넘게 이어가며 역대 최장 기록을 새로 썼다. 그는 미 동부시 기준 지난달 31일 오후 7시 연설을 시작했다. 부커 의원은 트럼프와 공화당이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정책과 조치들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헌법 가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며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말하겠다”고 선언한 뒤 실제 밤샘 연설을 강행했다. 부커 의원은 이날 최종 25시간 5분의 최장 연설 기록을 썼다.
한국 정치에서 익숙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와는 달리, 이번 연설은 특정 법안이나 인사안의 표결을 지연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다만 미국 상원 규정상 연단에 선 의원이 자리를 비우거나 앉으면 발언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부커 의원은 장장 23시간 넘게 서서 혼자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아예 의자를 책상에서 치워버렸다. 상원 동료인 크리스 머피 의원은 “그가 앉지 못하도록 스스로 유혹을 제거했다”고 전했다.
물이나 동료 의원들과 잠깐의 대화를 제외하곤 음식 섭취도 하지 않았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연설 도중 잠깐씩 동료 의원들이 질문을 던지면 그 순간 발언권이 잠시 넘어가며 쉴 수 있는데, 이를 이용해 간간히 물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책상 서랍에 진통제를 넣어두긴 했지만, 꺼내 쓰지는 않았다고 머피 의원은 전했다. 부커 의원은 대학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다. 2006~2013년 뉴저지 뉴어크 시장을 지냈고, 2013년부터 상원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커 의원은 이번 연설을 통해 트럼프와 공화당의 정책 전반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사회보장제도 축소, 연방정부 인력 감축, 외국인 추방 가속화를 위한 ‘적성국 국민법’ 활용, 예멘 공습 계획 논의 시 시그널 앱 사용, 그리고 무역 관세 확대 등의 문제를 열거하며 “이 모든 조치가 헌법을 훼손하고 미국의 가치를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는 평범한 시기가 아니며, 상원 역시 평범하게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밤샘 연설 도중 시민들이 보낸 편지를 낭독하고, 고(故) 존 루이스 하원의원과 고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연설을 인용하며 초당적 가치를 호소했다. 그는 “필요한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조차도 현재의 방향에 우려하고 있다는 공화당 유권자의 편지를 소개하며, 이 문제가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연설 도중 말 실수라도 하면 발언이 끊길 수 있기에, 부커 의원은 동료 의원의 질문에 답할 때도 대본에 적힌 문장을 그대로 읽으며 신중하게 연설을 이어가고 있다. 발언권이 중단되면 연설 자체가 끝나기 때문이다. 미 상원 규칙에 따르면 연단에 선 의원이 “발언을 양보한다”거나 “이만 물러나겠다” 같은 표현을 무심코 말하면 공식적 발언권 포기로 간주돼 연설은 종료된다. 부커 의원은 무심결에 ‘양보’나 ‘포기’ 같은 단어가 나오는 걸 피하려고 동료 의원의 질문에도 “나는 발언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문서에 적어두고 그대로 읽었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부커 의원의 연설은 미국 상원 역사상 가장 긴 연설로 기록됐다. 기존 최장 연설은 1957년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의 24시간 18분(민권법 반대)이었다. 이어 1986년 알폰소 다마토 상원의원의 23시간 30분(군용기 예산 반대),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2013년 오바마케어 반대 연설로 세운 21시간 19분 기록 순이었다. 크루즈 의원은 자신의 기록이 깨지자 소셜미디어에 만화 캐릭터 ‘호머 심슨’이 울고 있는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을 올렸다. 크루즈 의원은 그러면서 “내가 화재경보기를 당겨야 하나? 저 사람이 내 기록을 깨버릴 것 같다”고 썼다.
연설 중간 유머러스한 순간들도 나왔다. 밤샘 연설이 계속되고 난 뒤 1일 오전 6시 30분, 상원 동료인 피터 웰치(버몬트) 의원이 부커 의원을 도와주기 위해 질문을 하던 중 웰치 의원의 휴대전화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웰치 의원은 “(부커 의원과 달리) 밤새 깨어 있지 않는 저 같은 사람들은 아침에 알람을 쓴다. 죄송하다, 좀 일찍 왔다”라고 농담을 하자 현장에 있던 민주당 의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또 다른 동료 팀 케인(버지니아) 의원은 부커 의원의 연설을 250년 전 미국의 정치가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연설에 비유하던 중 갑자기 버지니아 주 깃발로 화제를 돌렸다. 케인 의원은 “참고로, 버지니아 주 깃발은 미국 50개 주 중 여성이 등장하는 여섯 개 깃발 중 하나고, 유일하게 상의 탈의 상태로 등장하는 깃발”이라고 하자 부커 의원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1월 트럼프 취임 이후, 민주당은 공화당 주도의 의회와 행정부에 뚜렷한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존재감 부족을 지적 받아왔다. 이번 부커 의원의 연설은 그런 흐름 속에서 민주당이 여전히 ‘저항의 정당’임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