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하워드 러트닉(오른쪽) 상무부 장관을 보고 있다./AFP 연합뉴스

전 세계를 진동하던 관세 전쟁 포성이 잠시 멎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국 등 70여 국가에 매긴 상호 관세를 90일간 유예하겠다고 9일 밝혔다. 미국 경제 ‘해방의 날’을 선포하며 무차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한 지 일주일 만이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도 대미 관세 대응 조치를 유예했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으로 전선을 집중하겠다고 했다. 중국에 대한 관세율을 125%로 상향, 즉시 발효하겠다고 한 것이다.

미 국채 금리의 갑작스러운 급등이 트럼프를 회군하게 했다는 분석이 많다. 국채 금리가 상승하면 미국 정부의 이자 부담이 크게 늘어나 재정이 악화된다. 미국 모기지론(주택담보대출) 금리도 국채 금리에 연동되기 때문에 미국 가계도 타격을 입는다.

트럼프는 이날 “채권 시장은 매우 까다롭다”며 “어젯밤에 사람들이 약간 불안해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실제 불안했던 것은 트럼프일 수 있다. 미국 모기지론, 신용카드 대출, 자동차 리스의 기본 금리로 쓰이는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지난 7일 연 3.86%에서 급상승해 이날 연 4.5%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이틀 만에 0.6%포인트 이상 오른 것이다. 2001년 이후 가장 큰 상승 폭이다. 경제가 불확실할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받는 미 국채에 돈이 모여 국채 가격이 상승(국채 금리 하락)하는 게 ‘공식’인데, 누군가 미국 국채를 내던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픽=김현국

트럼프의 유예 선언에 주식시장은 안도 랠리(강세)를 펼쳤다. 트럼프 발표 후 미 주식시장 3대 지수는 폭등했다. 9일 나스닥(12.2%)과 S&P500(9.5%) 상승률은 각각 역대 둘, 셋째를 기록했다. 이어진 10일 아시아 주식시장에서 한국 코스피(6.6%), 일본 닛케이(9.1%)도 급등했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도 관세 유예 발표 후 0.2%포인트가량 내려갔다.

◇美 국채·증시 이례적 동반 폭락에… 트럼프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미국 재정 상황은 중환자실에 누워 하루 담배 2갑을 피워대는 160㎏ 환자와 같습니다. 그런 환자가 중환자실을 바로 걸어나와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할 수 없죠. 우선 트레드밀부터 달려 매년 GDP(국내총생산) 대비 재정 적자를 1%포인트씩 줄여 나가야 합니다.”

9일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워싱턴DC에서 열린 은행협회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모르는 빚투성이인 미 연방정부가 회복하려면 힘들어도 조금씩 재활하며 빚을 줄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트럼프 행정부가 재정·무역 적자를 줄이겠다며 관세 전쟁을 선포한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 국채 금리를 특히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연방 부채 규모는 35조4600억달러(5경2000조원)다. 국채 이자로만 1조1300억달러를 썼다. 올해 국방비(8500억달러)보다 많다. 시장에서 국채 금리가 떨어져야 연방 정부가 지급하는 이자도 줄어든다.

◇국채 금리에 공들인 트럼프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다양한 정책 수단을 동원해 국채 금리를 안정시키려 해왔다. 가상 자산을 중시하는 정책도 그 일환이다. 달러와 코인의 가치를 일대일로 고정하는 스테이블코인 육성은 미국 국채 수요를 늘릴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려면 담보로 달러나 미 국채를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채 금리를 중시한다는 구두 개입도 자주 한다. 베선트 장관은 “트럼프와 나는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취임 초 연 4.6%였던 10년물 금리가 지난주 3%대까지 떨어진 것이다. 물가도 나쁘지 않았다. 10일 미 노동부는 3월 소비자물가가 1년 전보다 2.4% 상승했다고 밝혔다. 전문가 예상치(2.6%)를 밑도는 양호한 수준으로, 2월 물가 상승률(2.8%)보다 낮아졌다.

트럼프 정부는 금리 인하 추세가 관세 전쟁 이후에도 이어지길 기대했다. 주가가 떨어지면 투자자들이 채권 시장으로 대피해 금리를 떨어뜨리고, 관세 전쟁으로 경기가 위축되면 미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하할 여지도 커지기 때문이다.

◇관세 전쟁으로 튀어버린 금리

그러나 시장은 트럼프 정부가 기대했던 방향과 반대로 움직였다. 트럼프 입장에선 금리가 더 내려가야 하는데 거꾸로 올라간 것이다. 지난 7일 연 3.86%였던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이틀 만에 연 4.5%까지 급등한 것은 미 국채 가격이 그만큼 급락했다는 뜻이다.

그래픽=양인성

관세 전쟁으로 무역이 줄어들어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경우 미 정부는 부족한 세금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국채를 더 많이 찍어낼 가능성이 높다. 국채 발행 물량이 늘어나면 국채 가격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 때문에 채권 보유자들이 서둘러 투매에 나선 것이다. 로이터는 “채권 자경단(채권 금리를 올려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을 견제하는 투자자들) 출현의 전조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채권 7610억달러어치를 들고 있는 중국 정부가 관세 전쟁에 대한 맞불 작전으로 미 국채 투매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등장했다. 결국 트럼프는 관세 유예를 결정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였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파이낸셜타임스, BBC 등 주요 외신은 90일 관세 유예 결정에 대해 “트럼프가 혼돈에 빠진 채권 시장에 굴복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경제학자들은 “트럼프의 무차별 관세 정책이 역으로 금리를 올릴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중국·일본 등 미국의 무역국들이 미국에 대한 경상수지 흑자로 얻은 달러로, 미 국채를 매입하고, 미국이 이를 통해 적자 재정을 운영하는 것이 최근 미국 경제 운영의 기본 메커니즘이었다. 트럼프의 상호 관세로 미국의 무역국들이 미 국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달러 흑자를 보지 못하면, 미 국채에 대한 수요가 줄고, 결국 미 국채 금리는 상승할 수밖에 없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트럼프로서는 금리도 낮추고 싶고, 동시에 경상수지 적자도 줄이고 싶은데 그 둘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게 트럼프의 딜레마”라고 했다.

트럼프가 한발 물러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차관은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가 항구적으로 미국에 집중되는 현 체제를 수용하지 않고, 중국이 미국과 동등한 패권국으로 등극하는 것은 저지하겠다는 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일관된 목표”라고 했다.

☞미 국채 10년물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만기 10년짜리 채권이다. 미 정부가 원금과 이자를 보증해 손실 위험이 낮은 대표적 안전 자산이다. 이 채권 금리가 미 은행의 모기지론(주택담보대출) 금리 등의 기준이 돼 미국인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글로벌 금융시장을 매개로 해서 전 세계 금리의 척도 역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