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7국을 상대로 공표한 상호 관세를 낮추기 위해 각국이 미국과 협상을 추진 중인 가운데 일본이 16일 미국과 관세 관련 장관급 협상을 개시한다. 한국은 다음 주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알려졌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14일 소식통을 인용해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영국·호주·한국·인도·일본 등 다섯 우방국을 무역 협상의 최우선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최우선 협상국에 포함됐다고 해서 유리한 결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베선트는 14일 블룸버그에 “먼저 움직이는 사람의 이점이 있을 것”이라며 “보통 가장 먼저 협상을 타결하는 사람이 최고의 합의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각국에 ‘최선의 제안을 가져오라’고 요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교역 대상국과 하는 협상엔 트럼프 대통령도 직접 참여할 예정”이라고 했다.
한국과 여러 사안이 겹칠 수 있는 미·일 협상의 경우 일본은 먼저 ‘낮은 자세’로 미국의 요구 사항을 파악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알려졌다. 일본이 원하는 사안이나 양보할 ‘카드’를 먼저 드러내지 않고, 미국이 진짜 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결정한다는 뜻이다. 16일 방미 예정인 협상단장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관세 합의는) 빠를수록 좋긴 하지만, 그때그때 유효한 카드는 바뀔 것”이라며 “‘빠르고도 크게 대응한다’가 철칙”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의 지시로 관세 협상단을 꾸렸고, 협상단장인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곧 미국을 방문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트럼프가 한 대행과 통화하며 언급한 대로 무역 적자 해소뿐 아니라 안보·환율 등 원하는 것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원스톱 쇼핑’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베선트 장관은 14일 블룸버그에 “지난주에는 베트남, 수요일(16일)엔 일본, 다음 주에는 한국과의 협상이 있다”고 말했다.
◇ 한국 ‘참고서’ 될 日의 협상 전략… “교섭카드 숨기고 최대한 듣는다”
15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미·일 관세 협상이 16일 시작될 예정이며 17일엔 양측 협상 대표인 베선트 장관과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장관급)이 회담을 한다고 보도했다. 협상단장이자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최측근인 아카자와 경제재생상(7선 국회의원)은 출국 전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무엇보다 베선트 장관이나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게 ‘신뢰할 수 있는 협상 상대’라는 평가를 받겠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들은 “(일본은) 첫 회담에서 구체적인 협상 카드를 꺼내기보단, 미국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칼자루’를 쥔 미국의 요구 사항을 최대한 듣고 나서 일본의 대응 방향과 양보 수준을 정한다는 것이다. 다만 미국은 “먼저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베선트는 14일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일본이) 무엇을 들고 왔는지 보고 나서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서로 상대의 ‘카드’를 먼저 까 보이라는 상황이어서, 실제 회담에서 ‘밀고 당기기’가 중요할 전망이다.
미국은 농산물·자동차 등 미국의 수출품에 대한 일본의 무역 장벽 철폐와 함께 미국 알래스카의 액화천연가스(LNG) 개발·수출, 엔화 대비 강한 달러 가치(강달러) 문제, 주일 미군의 분담금 등 무역·환율부터 에너지·안보 문제까지 양국 간 모든 과제를 협상에 올리는 패키지 딜(package deal·통합 거래)을 원하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안보 문제와 관련, “그것은 무역과는 관계없지만, 우리는 (협상의) 일부로 하겠다. 왜냐하면 한 패키지에 다 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으로선 패키지 딜만은 피하고 싶은 것이 ‘혼네(本音, 일본어로 ‘속내’란 뜻)’다. 안보 측면에서 절대 의존하는 동맹국인 미국이 안보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순간 무역이나 환율 문제에서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닛케이는 “일본은 무역·환율 협상을 안보와 분리해야 유리하지만 지일파(知日派) 베선트는 일본의 약점을 잘 아는 인물”이라며 “안보가 협상 대상이 되면 일본은 한층 더 양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본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국이 첫째 협상국으로 일본을 지정한 것은 ‘안보’를 포함하면 가장 유리한 첫 타결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 이번 협상에서 트럼프가 지난 2일 24%로 예고한 상호 관세율을 낮추는 동시에 미국이 수입 자동차와 철강에 이미 부과하고 있는 25% 품목 관세를 유예받거나 낮춰야 하는 입장이다.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비(非)관세 장벽이나 환율, 알래스카 LNG 등에 미국이 관심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알래스카 LNG 수입량 확대라면 곧바로 수용 가능하지만 트럼프가 지난 3월 언급한 ‘공동 개발’을 뜻한다면 간단히 해결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미국이 미 국채 최대 보유국인 일본에 “(금리가 낮은) 초장기 국채로 갈아타라”는 요구를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 관세 전쟁이 격화하면서 주식과 함께 미 국채 가치까지 하락(국채 금리 상승)해 문제가 됐는데 일본이 이를 사줘서 가격을 방어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1985년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올린 ‘플라자 합의’로 1990년대 거품 경제 붕괴를 맞은 일본으로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다.
이시바 총리는 “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며 “얼른 타협하고 빨리 협상을 마무리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모든 부처의 각료(장관)가 참여하는 ‘종합 대책 본부’에선 “모든 부처가 협상 당사자라는 인식하에 협상을 뒷받침하라”고 지시했다고 알려졌다. 다만 일본은 보복관세는 현재로선 검토하지 않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최근 국회에서 “미국의 관세는 국난(國難)”이라면서도 “(보복관세는) 일본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