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 기독교 명절인 부활절을 앞두고 30시간의 ‘부활절 일시 휴전’을 발표했다. 지난달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30일 전면 휴전’ 제안을 거부하고, 어렵사리 합의한 ’30일 부분 휴전(에너지 시설 등에 대한 공격 중단)’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내놓은 일방적 선언이다. 우크라이나가 “위선적 제안”이라며 반발한 가운데, 일각에선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24시간 내 종전’을 자신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독재자 푸틴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실)은 부활절 전날인 이날 “푸틴 대통령이 오후 6시부터 부활절이 끝나는 21일 0시까지 30시간 동안 부활절 휴전을 선언하고, 이 기간 동안 모든 적대 행위의 중단을 명령했다”고 발표했다. 크렘린궁은 “이번 휴전 선언은 인도주의적 고려에 의한 것”이라며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모범을 따를 것(휴전에 동참)이라고 기대한다”고 밝혔다.
푸틴의 일방적 발표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위선적 제안”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텔레그램에 “지금 이 순간도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공습 경보가 울리고 러시아의 드론(무인기)이 날아다니고 있다. 푸틴이 사람 생명을 가지고 다시 한번 게임을 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날 저녁 소셜미디어 X를 통해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30일간 휴전하자”는 역(逆)제안도 내놓았다.
푸틴의 짧은 휴전 선언조차 ‘말 잔치’에 그쳤다는 평가다. 젤렌스키는 20일 오전 “러시아군이 오늘 아침까지 최전방에서 59차례 포격을 하고, 5차례 공격을 시도했다”며 러시아군은 30시간 휴전조차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이 도네츠크주를 공격했다”고 맞받아쳤다. 푸틴은 2023년에도 정교회 성탄절(1월 7일)을 하루 앞두고 36시간의 일시 휴전을 명령했었다. 그때도 러시아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우크라이나도 “러시아가 휴전을 전술적으로 이용한다”며 휴전을 거부했었다.
결국 푸틴의 ‘부활절 휴전’ 제안은 트럼프를 의식한 ‘위장 전술’일 뿐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푸틴은 지난달 11일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합의한 30일간의 무조건적 휴전을 “실익이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추가 협상을 거쳐 30일간의 부분 휴전에 합의했으나, 이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휴전 협상을 중재해 온 트럼프와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전날 러시아를 겨냥해 “협상에 중대한 진전이 없을 경우, 미국은 발을 뺄 수 있다”는 경고까지 했다.
미국의 이런 압박이 푸틴에게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지난달 30일에도 트럼프는 휴전에 비협조적인 푸틴의 태도를 비판하며 “푸틴에게 매우 화났다. 러시아산 석유를 구입하는 나라에 25~50%의 2차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했지만 푸틴은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서방 언론들은 “트럼프의 휴전 중재 노력이 사실상 무산될 위기”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중재에서 철수하겠다”는 트럼프의 위협도 사실상 중재 실패를 인정하는 꼴이란 것이다. 영국 가디언은 “트럼프의 협상 철수 위협은 외교 전문성과 전략 부재를 드러낸 것”이라며 “트럼프식 ‘속전속결 협상’만 고집하다 문제가 생겼다”라고 지적했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유럽을 배제한 채 푸틴과의 휴전·종전 협상만 시도했다. 그러나 당초 공언과 달리 트럼프가 제안한 30일간의 무조건 휴전안은 푸틴의 호응이 없어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스티브 윗코프 미국 중동 특사가 푸틴 측과 수차례 접촉했지만 협상 진전은 없었다. 러시아는 미국의 인내심 소진을 노리고 있다고 가디언은 분석했다. 부동산 전문 변호사 출신으로 외교 경험이 없는 윗코프의 자질 논란도 일고 있다.
트럼프가 협상 교착을 참지 못하고 종전 협상에서 손을 떼더라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잃을 것이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평화 중재자(peace maker)’ 역할을 자임해 온 트럼프에게 굴욕을 안기고, ‘미국 일극 체제를 끝내고 다극화된 세계를 만들겠다’고 공언해 온 푸틴에겐 외교적 승리가 될 수 있다. 미하일로 사무스 우크라이나 신지정학연구소장은 “미국이 종전 협상에서 물러난다면, 그것은 트럼프가 자신의 무력함을 자인하는 셈일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