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유엔 안보리 비공식 회의에서 관세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충돌했다. /유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무역 갈등이 심화 되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이 공개된 국제무대에서 서로를 향해 날 선 공격을 퍼부었다. 두 나라는 지난달 관세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 서로를 향해 비난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불과 몇 미터 되지 않은 한 공간에서 얼굴을 붉힌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뉴욕 유엔 본부에서는 의장국인 중국이 주재하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비공식 회의 ‘아리아 포뮬러’가 열렸다. 아리아 포뮬러는 안보리 이사국의 요청이 있을 때 열리는 비공식 회의로 안보리 공식 의제에 오르지 않은 주제나 이사국 간 이견으로 공식 회의 개최가 어려운 주제를 논의할 때 열린다. 이날 회의는 중국 요청으로 소집됐다. 회의 주제는 ‘일방주의와 약자 괴롭힘 관행이 국제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이사국들은 회의 전 자료(콘셉트 노트)에서 이 회의가 관세 문제와 관련됐다는 점을 확인했다. ‘관세’ 주제가 안보리에서 논의된 전례는 찾기 어렵다.

◇中 “미국의 관세, 글로벌 경제 질서 교란”

푸총 주유엔 중국대사는 회의 시작 직후 발언에서 “최근 미국은 온갖 구실을 내세워 모든 교역 파트너에게 관세를 부과하고 있고 이는 모든 국가의 합법적인 권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며 WTO(세계무역기구) 규정을 심각하게 위반한다”며 “규칙에 기반한 다자무역체제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글로벌 경제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미국은 ‘호혜’와 ‘공정’이라는 외피를 쓰고 본질적으로 관세를 수단으로 기존의 국제 경제·무역 질서를 전복하고 미국의 이익을 국제사회의 공동 이익보다 위에 두며 모든 국가의 정당한 이익을 희생시켜 자국의 패권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세계는 다시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단호하게 다자주의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일방주의가 제멋대로 퍼지도록 둘 것인가”라며 “국제 관계의 민주화를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강권 정치에 눈감을 것인가”라고 했다. 푸총 대사는 “국제법과 국제 관계의 기본 규범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며 “모든 나라의 근본적인 이익과 인류의 미래에 관련된 중대한 문제에 대해 국제 사회는 반드시 올바른 선택을 하고 통일된 목소리를 내며 공동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주유엔 푸총 중국 대사가 2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관세 문제를 두고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유엔

중국은 이어 “높은 관세 장벽을 세우는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고 세계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 주권 평등이 필요하다”며 “어떤 나라도 국제법 위에 군림할 권리는 없고 ‘주먹이 큰 자’가 좌지우지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약자를 괴롭히고 위협과 강요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승자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푸총 대사는 “중국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문제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면서 “미국이 진정으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평등, 존중, 상호 이익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美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이 문제”

대사급이 아닌 참사관이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미국은 중국 주장에 반박했다. 팅 우 주유엔 미국 대표부 참사관은 “오늘 회의는 보여주기식 전략에 불과하며 아무런 실질적인 내용이나 신뢰성이 없다”고 했다. 이어 “국제 시스템에 대한 중국의 기여를 판단할 때 세계는 중국의 공허한 주장보다는 그 행동을 봐야 한다”며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은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무역 관행을 펼쳐왔고 이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시장 경제와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했다. 그는 “중국은 국가 보조금과 비시장적 수단을 사용해 과잉 생산 능력을 구축하고 전 세계에 수출 물량을 쏟아내 현지 경제를 붕괴시킨다”며 “반독점 및 반덤핑 조사 같은 비관세 조치를 다양하게 사용해 전 세계 농민들과 제조업자들에게 타격을 준다”고 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환경을 재정비하고 있고 중국이 더 이상 부당한 이익을 취할 수 없게 하고 있다”며 “중국이 유엔에서 자국의 권위주의 원칙을 뿌리내리려는 목표에 대응할 것이고 공정한 경제 경쟁 환경을 수호하고 지식재산권 절도보다는 혁신을, 권위주의보다는 자유시장 경제를 지지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특히 발언 중간에 중국, 필리핀, 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영토분쟁 지역인 남중국해에 있는 스카버러 암초를 언급하기도 했다.

주유엔 미국 대표부 팅 우 참사관이 23일 중국 발언에 반박했다. /유엔

◇숨죽인 안보리 이사국, 美와 관세 협상 의식

미국과 중국이 강도 높게 서로를 비난하고 나서자 이를 지켜보던 유엔 관계자들 사이에서 “양측이 작심하고 나온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다른 안보리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프랑스·한국 등 대부분 미국 관세 정책에 영향을 받고 미국과 협상 중인 국가다. 이들은 회의 참석도 대사급이 아닌 참사관급이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미국과 종전 협상을 벌이는 러시아도 미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러시아는 일방적인 무역 제한 조치의 증가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면서 중국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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