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대만 타이베이 천주교 타이베이대교구 성당에 마련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빈소. 미사를 마친 조문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나누던 이야기 주제는 전날 발표한 라이칭더 총통(대통령)의 교황 장례 미사 불참이었다. 바티칸은 대만과 수교한 전 세계 12국 중 하나로, 유럽 내 유일한 대만 수교국이다. 26일 열리는 장례 미사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주요국 정상들이 참석 의사를 밝혔다. 이에 따라 모처럼 중국의 압박에서 벗어나 각국 정상들과 ‘조문 외교‘를 진행할 기회였지만 라이칭더는 참석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앞서 21일 교황의 선종 소식이 알려진 직후 라이칭더는 신속하게 소셜미디어에 애도 성명을 낸 뒤 21~22일 총통부(대통령실)와 행정원(정부 청사) 건물에 조기를 게양토록 했다. 이어 22일에는 대만 외교부가 “총통이 대만을 대표해 장례 미사에 참석하기를 최우선 목표로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며 라이칭더의 바티칸행을 시사했다. 그러나 23일 외교부는 라이칭더가 아닌 천젠런 전 부총통을 특사 자격으로 파견한다며 입장을 바꿨다.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종 때 천수이볜 전 총통도 바티칸 장례 미사에 참석했고, 2013년 3월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식에는 마잉주 전 총통이 참석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라이칭더의 불참은 더욱 이례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날 만난 조문객들은 대체로 아쉬워하면서도 정부 처지를 이해한다고 입을 모았다. 황준젱(50)씨는 “바티칸과 맺은 관계가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총통의 교황 장례식 불참 결정은 외교적 상징성보다 실질적 국제 관계에 집중하려는 선택이었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천주교 신자가 대만 인구의 약 1%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라이칭더의 장례 미사 불참이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압박과 후폭풍을 우려한 고육책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름을 니클라스(39)라고 밝힌 한 조문객은 “대만으로서는 모처럼 세계 주요국 정상들과 만나 교류할 좋은 기회였지만, 중국에서 받을 압박을 감수하면서까지 총통이 참석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름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40대 린모씨는 “아무리 정치적으로 민감한 자리라고 해도, 조문조차 가기 힘든 현실이 슬프다”며 “이럴 때마다 약소국의 비애를 짙게 느낀다”고 했다.
대만 외교부 당국자는 23일 브리핑에서 총통의 교황 장례 미사 불참과 관련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총통 불참이 중국의 압력 때문은 아니었냐는 질문에는 “시간이 매우 촉박해 충분히 논의하기 어려웠다”고 답했다. 총통 참석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전직이 아닌 현직 부총통을 보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허쥔 국립중흥대학교 국가정책공공사무연구소 교수는 연합보에 “총통이 참석할 수 없을 경우 현직 부총통에게 국가를 대표하도록 하는 것이 격에 맞는다고 본다”고 했다.
대만 총통의 교황 장례식 참석 문제는 긴박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정세와 맞물려 주목받는다.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가기 전인 1942년 바티칸과 수교한 뒤 지금까지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대만을 정부로 인정했다는 이유로 1951년 바티칸과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중국과 바티칸 관계가 ‘해빙 모드‘로 접어들면서 대만과 바티칸의 관계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 중국도 프란치스코 교황 애도 행렬에 동참했다. 중국 외교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에 애도를 표하며 “바티칸과 관계 개선을 촉진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관제 가톨릭 기구인 ‘중국천주교애국회’ 역시 공식 애도 메시지를 냈다.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중국과 바티칸의 관계가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 재위기에 빠른 속도로 개선된 상황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할 때 최초로 교황의 자국 영공 통과를 허용했고, 교황은 시진핑 국가 주석과 중국 국민에게 축복 메시지를 전달해 중국 방문 희망을 피력해 대만을 긴장시켰다.
프란치스코 재위기에 바티칸과 중국의 오랜 갈등 현안이었던 주교 임명권 문제도 해결됐다. 2018년 양측은 중국 정부가 독자 임명한 주교를 바티칸이 승인하고, 중국은 교황을 세계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는 내용의 합의에 도달해 계속 연장해 왔다. 세계 2위 인구 대국인 중국과 접점을 늘리고 싶은 바티칸은 대만과 맺은 관계 설정에 고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