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을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로 들끓게 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백인 경찰에 대한 사법 단죄로 일단락됐다. 미네소타주 헤너핀 카운티 배심원단은 사건 11개월여 만 인 20일(현지 시각) 이 사건 피고인인 전 경관 데릭 쇼빈(45)에게 만장일치로 유죄를 평결했다.
배심원단 12명은 10시간에 걸친 심리 끝에 쇼빈의 기소 죄목이었던 2급 살인(살해 의도가 있는 살인), 2급 우발적 살인, 3급 과실치사 등 세 가지 혐의 모두를 유죄로 판단했다. 미국에선 시민 배심원단이 유무죄 평결을 내리면 담당 판사가 구체적 형량을 결정한다. 형량에 대한 1심 선고는 8주 후에 이뤄질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쇼빈에게 약 40년 징역형이 선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쇼빈은 지난해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의 담배 가게에서 20달러(2만2000원)짜리 위조지폐를 사용한 혐의로 플로이드를 체포하고 그의 목을 무릎으로 9분 29초간 짓눌러 숨지게 했다. 쇼빈은 그간 재판에서 “플로이드의 사인(死因)은 약물 과용과 지병 때문이며, 난 범죄 용의자 대응 지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의사 등 증인 45명은 “쇼빈이 비무장 시민에 대해 체포 지침을 벗어나 과도한 무력을 행사했으며, 플로이드는 질식사했다”고 증언했다.
이날 평결이 나오자마자 법원 주변에 모여있던 시민 수천명은 일제히 “정의가 실현됐다” “조지 플로이드”를 외치며 환호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 우린 중요하다고(we matter)”라며 주저앉아 소리 내 우는 흑인 여성들도 있었다. 법정에서 방청하던 플로이드의 형제들은 검사를 끌어안고 울면서 “이제 다시 숨 쉴 수 있다”고 했다. 플로이드가 목이 눌린 채 20여 차례 내뱉은 “숨을 쉴 수가 없어”란 말을 상기시키며 이제야 플로이드의 한을 풀 수 있게 됐다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이날 평결을 앞두고 헤너핀 카운티 법원 주변은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였고, 주 방위군 3500여 명이 투입됐다. 무죄 평결이 나올 경우 흑인을 중심으로 한 폭력 시위가 미 전역에서 일어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죄 평결로 난동이나 폭력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뉴욕, LA, 시카고, 애틀랜타 등 주요 대도시 중심가에도 시민들이 몰려나와 중계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평화 집회를 이어갔다.
뉴욕타임스(NYT)는 “플로이드 사망부터 이날 평결에 이르는 지난 11개월의 ‘드라마’는 1960년대 이후 이어진 흑인 민권 운동사에 정점을 찍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모든 흑인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경찰의 관행적인 과잉 진압 사례는 수십년 이어졌지만, 플로이드 사건의 경우 충격적인 현장 동영상이 퍼지면서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를 건드렸다. 이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백인 중심의 역사 지우기 운동으로 확대됐다. 2020년 미 대선 핵심 슬로건이 인종차별이냐(민주당), 인종차별 규탄을 내세운 법질서 파괴냐(공화당)로 갈리기도 했다. 결국 바이든 정부 출범과 함께 ‘흑인을 차별하는 기존 사법제도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이번 평결의 배경이라고 NYT는 분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쇼빈 평결 전후로 플로이드의 유족에게 두 차례 위로 전화를 하고, 공개적으로 중계를 시청하는 등 큰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회견을 열어 “오늘 평결은 정의를 향한 큰 진전”이라면서, 플로이드 유족에게 대통령 전용기를 보내 백악관으로 초청하겠다고 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오늘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통이 끝난 건 아니다”라면서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제도 개혁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진정한 정의는 하나의 평결 이상이어야 한다”며 사법제도 개혁을 촉구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흑인 목숨은 영원히 소중하다”고 했으며,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플로이드의 죽음에 충격 받았는데, 오늘 평결을 환영한다”고 했다. 애플, GM, 페이스북 등 미 대기업 최고 경영자들도 일제히 환영 성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