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역이 급증하는 총격 사고로 신음하는 가운데, 뉴욕주가 6일(현지 시각) ‘총기 폭력 비상재난사태’를 선포했다. 미국의 주정부가 총기 폭력과 관련, 비상재난사태를 선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이날 맨해튼 존제이 형사사법대에서 비상사태 선포를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이것은 생명을 구하는 문제이며, 뉴욕의 미래도 여기에 달렸다”고 말했다. 뉴욕은 1년 3개월간 발효했던 ‘코로나 비상재난사태’를 지난달 24일 해제했는데, 불과 12일 만에 또 다른 비상사태를 선언하게 됐다.
이에 따라 뉴욕은 총기 인명 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1억3870만달러(약 1573억원)의 예산을 들여 주정부 총기폭력예방국과 경찰 총기 밀매 차단반 등을 신설하고, 총기 폭력 빈발 지역에 병력을 집중 투입하며, 범죄 유혹에 빠지기 쉬운 청년층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복지 프로그램도 강화키로 했다. 쿠오모 주지사는 총격으로 인한 부상·사망 사건에 대한 민사 재판 때 피해자들이 총기 제조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안에도 서명했다. 패트릭 샤키 프린스턴대 교수는 “총기 폭력을 줄이기 위해선 광범위한 투자와 함께 각종 전략과 자원을 정교하게 묶어야 한다”며 “그런 노력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총기 폭력이 이슈가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특히 지난해부터 총격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급증하면서 최대 사회문제로 급부상했다. ‘총기 폭력 아카이브’에 따르면 올해 1~5월에만 미국에서 8100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하루 평균 54명꼴이다. 지난 6년간 같은 기간 하루 평균 총격 희생자는 40명이었는데 30% 이상 늘어난 것이다. 올 들어 뉴욕에서만 총 767건의 총기 폭력이 발생, 885명이 사망했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40% 증가했다.
지난 독립기념일 연휴(2~4일)에만 미 전역에서 540건의 총격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189명이 숨지고 516명이 다쳤다. 연휴 첫날 조지아주 골프장에서 프로 골퍼가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고, 버지니아에선 15세 소년이 총을 난사해 6~16세 어린이 4명이 다치기도 했다. 쿠오모 주지사는 “이 연휴 사흘간 뉴욕에선 코로나 중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13명이었는데, 총기 사고 사망자는 51명이었다”고 말했다. 코로나보다 총이 더 실존적 위협이 됐다는 뜻이다.
시중에 풀린 총기 물량도 급증했다. 미국인들은 지난해 총 2300만 정의 총기를 새로 구입했다. 2019년 총기 구매량보다 66%나 증가한 양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총기를 소지할 자격이 없는 이에게 총기를 팔거나 신원조회를 제대로 하지 않는 총기 판매상을 규제하는 안을 내놓고 “죽음의 상인들에게 무관용 조치를 하겠다”고 했지만, 현장에선 아직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여러 총기 사고 관련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근본적인 총기 규제 입법은 공화당 반대로 처리되지 않고 있어 실효가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했다간 미국 사회가 희망 없는 사회가 될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총격 사건은 계층과 인종 문제로도 비화되고 있다. 실제로 가난한 계층이나 흑인 또는 라틴계 청소년의 피해자가 백인보다 3~10배 더 많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총격 사건이 폭증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범죄 전문가들은 우선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 불황으로 서민층 소득이 급감하고 음모론이 횡행하는 등 사회 불안이 높아진 점을 꼽는다. 여기에 올 들어 방역 봉쇄 완화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끼리 접촉이 늘어나고, 여름이 시작돼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등 범죄를 촉발할 요인이 한꺼번에 맞물린 점도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지난해 미국을 휩쓴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M)’ 시위 여파로 경찰 예산과 조직을 축소하는 조치가 곳곳에서 시행되자, 치안 공백을 틈타 총기 폭력이 늘고 이에 대응해 총기 구매도 덩달아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총기 사고 급증에 놀란 대도시들은 삭감했던 경찰 조직을 속속 복구하고 있다. ‘BLM’ 시위 진앙이었던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시는 지난해 경찰 해체를 선언하고 예산 800만달러(약 91억원)를 삭감했다가, 경찰들이 분노해 대거 사임하면서 범죄가 폭증하자 올해 640만달러(약 73억원)를 들여 새 병력을 채용했다. 메릴랜드 볼티모어시는 지난해 삭감했던 경찰 예산 2200만달러(약 250억원)를 삭감했다가 최근 2700만달러(약 307억원)를 투입해 오히려 예산이 더 늘었다.
미 최대 경찰 조직인 뉴욕 경찰도 지난해 예산 4억달러(약 4545억원)가 깎였다가 올 들어 강력 범죄 대응을 위해 이미 절반 이상이 복구됐다. 지난달 치러진 뉴욕시장 민주당 경선 결과 6일 경찰 출신인 에릭 애덤스 후보가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애덤스는 치안 강화와 강력한 경찰 공권력 복구를 내세운 인물로 보수 진영에서도 지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