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53‧민주)에 대한 주민소환 투표가 2주 뒤(9월14일)로 다가왔다. 캘리포니아는 단일 경제규모로는 전세계 5위이고, 미국에서 가장 ‘민주당스러운’ 주다.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이 64%의 지지를 얻었고, 뉴섬 주지사도 2018년 역대 주지사 선거 중 최고인 62%의 지지를 받았다. 2400만 명의 등록 유권자 중 민주당원 비율(46%)이 공화당원(24%)을 2대1로 압도한다. 민주당이 ‘일당(一黨) 독주’하는 주다.
이런 캘리포니아주에서, 토크 라디오(talk radio) 호스트로 트럼프 지지자인 공화당의 래리 엘더(69)가 강력한 차기 주지사 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영세민‧노인‧아동에 대한 건강보험인 메디케이드(Medicaid)의 감축을 원하고, 총기단속과 마스크 착용에도 반대한다. 기후변화는 ‘헛소리’라고 주장한다. 최근 그의 여자 친구는 “엘더가 대마초에 취해, 나에게 총을 겨눈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그의 지지율도 고작 20% 남짓. 그런 그가 어떻게 차기 주지사로 가장 유력한 것일까.
◇현직 주지사는 소환 ‘찬성’표가 50% 넘으면 자동 탈락
‘비밀’은 주지사 소환투표지의 질문 방식과 절차에 있다. 투표지는 먼저 ‘주지사 소환’에 찬성하는지를 묻고, 그 다음에 46명의 후보자 중 선호하는 사람을 묻는다. 뉴섬 현(現)주지사는 이 46명에 포함되지 않는다. ‘소환 찬성’이 50%를 넘지 못하면, 뉴섬은 살아 남는다. 그런데 ‘찬성’이 50.01%만 돼도, 뉴섬이 빠진 46명 중에서 1위 한 사람이 뉴섬의 잔여 임기(2023년 1월)을 채우게 된다. 즉, 49.99%가 뉴섬의 주지사 ‘잔류’를 희망하더라도 지지율 20%인 엘더가 차기 주지사가 돼, 주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후보’가 자리에서 쫓겨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7월 중순 이후 여러 여론조사 결과를 취합한 결과는 ‘소환 반대’가 51.0%, ‘소환 찬성’이 45.4%. 뉴섬으로선 아슬아슬하게 50% 이상의 지지(소환 반대)를 받는 셈이다.
이번 주민소환 투표는 캘리포니아에선 두 번째다. 2003년 당시 민주당 주지사인 그레이 데이비스는 극심한 정전 사태로 인해 55%의 찬성으로 소환됐고, 공화당의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48.6%의 지지를 받아 주지사가 됐다.
◇민주당 성향 언론들 ‘소환 반대’ 여론 몰이
현재 주(州)민주당은 첫 번째 질문은 ‘반대(지사직 잔류)’를 택하고, 두 번째 질문은 빈칸으로 남겨놓으라고 독려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뉴섬 대신 누굴 뽑을까’ 고민할 여지도 남겨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로스엔젤레스타임스, 머큐리뉴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등 주내 유력 매체들도 모조리 ‘소환 반대’다. 뉴섬 주지사는 6000만 달러(약700억원)의 자금을 모아 ‘생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스트리밍 업체인 넷플릭스의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도 지난 5월 300만 달러를 뉴섬 주지사 측에 전달했다.
◇공화당에게 뉴섬은 ‘진보의 화신’
공화당에게 뉴섬은 미국 진보 진영의 아이콘(icon)이다. 뉴섬과 그의 첫 번째 아내 킴벌리 길포일은 잡지 하퍼스바자에 “새로운 케네디 부부”로 소개되기도 했다. 길포일은 현재 트럼프의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와 교제 중이다.
뉴섬은 샌프란시스코 시장 재직 시절, 미국에서 처음으로 동성(同性)간 결혼을 허용했다. 주지사로선 마리화나 합법화, 대량 살상 총기의 소유 금지, 사형집행 유예를 단행했다. 각종 리버럴한 정책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 종종 미국 전역으로 번진다. 민주당 주에 사는 공화당 성향 주민들은 뉴섬의 동성애‧증세(增勢)‧확대 재정 정책을 혐오하며 소외감을 느낀다.
◇ ‘노 마스크’ 파티로 ‘위선 덩어리’로 전락
사실 이번 주민소환 움직임은 그에게 벌써 여섯번째다. 처음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 11월초, 나파밸리의 한 고급 식당에서 마스크도 안 쓰고 실내에서 한 지인을 위해 파티를 연 것이 결정타가 됐다. 폭스뉴스에 ‘엘리트의 위선’으로 이 모습이 공개됐다. 그때까지 뉴섬의 소환투표 청원자는 5만5000명에 그쳤지만, 이후 한 달 새 45만 명이 됐다.
뉴섬은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학부모들의 반발에도, 공립학교를 강제로 문을 닫게 했지만, 그의 네 아이는 주의 명령에 제한을 받지 않는 사립학교에 다닌다.
◇그래도 민주당 아성인데…
이코노미스트는 “일반 선거와 달리 주민소환 투표에선 민주당 열렬 지지자들을 결합하기가 쉽지 않다”며 “민주당 지지 비(非)백인계 유권자를 투표하게 하는 것은 공화당계 백인 노인들보다도 어렵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민주당은 이번 소환 투표가 ‘트럼프의 역습’이라며 긴장감을 조성하지만, 트럼프가 후보 명단에 없는 투표에 민주당 지지자들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도했다. 또 애초 뉴섬을 지지했던 민주당 지지자들조차도 오랜 가뭄과 잦은 산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장기간 방역과 경기 침체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들에게 영화배우처럼 번드레한 외모의 ‘뉴섬 왕자님’은 희생양으로 적격이었다. 뉴섬은 주지사 중에서 가장 먼저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지만, 주민들의 민원에도 학교와 상점의 개폐(開閉) 조치를 자의적으로 해 많은 지지자가 돌아섰다.
◇자칫하면 연방 상원의원 ‘50대50’ 구도도 무너질 판
미 연방 상원의 구도는 현재 민주‧공화가 50대 50이다. 가부동수(可否同數)일 경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캐스팅보트를 쥔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주의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인 다이앤 파인스타인(88)은 연로해 임기(2024년 1월)를 못 채우고 사망할 수도 있다. 파인스타인이 심각한 알츠하이머를 앓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방금 브리핑을 마친 보좌관에게 “왜 브리핑을 안 하느냐”고 야단쳤다는 류의 얘기가 미 언론에 소개된다.
그래서 이번 소환 청원 전부터 파인스타인에게 사퇴 압력이 있었지만, 그는 “소환 투표는 뉴섬의 문제”라며 2024년(91세) 재선 출마 서류를 이미 연방 선관위에 제출했다. 만약 뉴섬의 소환 ‘찬성’이 50%를 넘기고 파인스타인 의원이 임기를 못 채우고 사망하면, 후임 공화당 주지사는 당연히 공화당 상원의원을 지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