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제35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JFK)의 딸인 캐롤라인 케네디(64) 전 일본 대사를 호주 대사에 지명했다. 같은 날,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JFK의 암살(1963년 11월22일)을 둘러싼 각종 정보 문서와 메모 1491건을 공개했다. 이 문서들은 미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국방부, 국무부가 작성한 암살 관련 문서와 메모, 전문(電文)들이다.
그러나 1만4000건에 달하는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미국 정부의 문서는 여전히 ‘국가 안보’상의 이유로 대외비다. 58년 전 발생한 암살 사건 문서들이 왜 아직도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설명도 없다. 이 탓에,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배후 세력의 존재 등에 대한 음모론은 끊이지 않는다.
◇JFK 암살 문서는 아직도 찔끔찔끔 공개
지금까지 밝혀진 JFK 암살 사건 개요는 당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쿠바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를 숭배하던 리 하비 오스왈드가 혼자 저지른 범행이고, 감금된 오스왈드를 권총으로 살해한 나이트클럽 주인 잭 루비 역시 단독범행이라는 것이다.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이 10개월간 이끈 암살 조사위원회가 1964년 내린 이 결론을 뒤집을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후 오스왈드가 범행 전에 멕시코시티에 가서 소련‧쿠바 대사관과 접촉하고 KGB 요원과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은 CIA의 첩보활동으로 공개됐지만, 이들 국가가 케네디 암살을 함께 모의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오스왈드가 멕시코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케네디를 죽이겠다”고 얘기하고 다닌다는 첩보도 당시 다 수집됐었다.
15일 공개된 문서들도 이미 드러난 오스왈드의 범행 전 행적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정보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이날 일부 문서의 해제는 1992년 제정된 ‘케네디 암살기록보관법’에 따라 이뤄졌다. 당시 암살 배후로 쿠바‧소련, 마피아 보스, 심지어 미 정보기관 개입, 보수적인 억만장자의 사주 등 온갖 설이 난무하자, 미 의회는 이 법을 제정하고, 25년 내에 모든 관련 기밀문서를 공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법이 정한 시한인 2017년이 되자, 트럼프는 이 법에 명시된 현직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해 공개하지 않았고, 바이든도 내년 12월15일까지 공개 시점을 늦췄다. 다만 바이든은 CIA와 FBI 등 정보수사기관의 반대에도, 15일 일부 문서만 공개했다. 결과적으로 1만4000건에 달하는 문서는 계속 비밀에 싸여 있다.
◇미 정보기관들, 무능 숨기려고 ‘완전 공개’ 꺼리나
2017년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1%는 ‘오스왈드 말고도 다른 세력이 암살에 개입했다’고 믿는다. 미 정보기관들은 이제 60년이 다 돼 가는 미 대통령 암살 관련 정부 문서들의 완전한 공개를 왜 꺼리는 것일까. JFK 문서의 완전 공개를 요구해 온 스티브 코언 연방하원(민주)은 “오스왈드 단독 범행이라는 것을 뒤집을 기밀 문서는 없다고 본다”며 “CIA, FBI 같은 연방 정보‧수사기관들은 오스왈드를 범행 이전부터 밀착 감시해 놓고도 범행을 막지 못한 무능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들 기관은 1963년 워런 조사위원회에도 자신들이 오스왈드를 감시해 온 정도를 가볍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JFK는 바이든의 우상
바이든 대통령이 캐롤라인 케네디를 호주 대사로 심각하게 고려 중이란 소문은 5월부터 나왔다. 캐롤라인은 미 대선 초기인 작년 2월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에 바이든을 지지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적 보은(報恩)의 차원을 넘어선다. ‘케네디’란 이름은 바이든 개인적으로 동일시하고 싶은 이름이고, 양극으로 여론이 쪼개진 현미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또 캐롤라인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일본 대사를 지내며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아베 신조 총리와 미국과의 깊은 우호적 관계를 이끌어내며 역량을 발휘했다.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호주‧영국 간 군사파트너십인 ‘오커스(AUKUS)’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 호주에서 미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이익을 대변할 최적의 인물로 평가된다.
전문적인 뉴스 분석 웹사이트인 ‘컨버세이션’은 “캐롤라인의 호주 대사 지명은 호주에게도 영예로운 일로, 그를 통해 호주의 관심사가 워싱턴에 분명히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JFK(1917년 생)은 한 세대 뒤인 바이든(1942년 생)에게 어떻게든 닮은꼴을 찾고 싶은 우상이었다. 실제로 둘 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이며, JFK가 큰 형을 2차 대전 때 잃은 것처럼, 바이든도 첫 아내와 딸, 장남을 교통사고와 병으로 잃었다. 작년 9월말 1차 대선토론에서 바이든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JFK가 정치에 입문한 보스턴과 바이든의 정치적 고향인 스크랜턴(펜실베이니아)은 미국에서 아일랜드계 정착민이 가장 많은 곳이다. 바이든은 미국 사회에서 ‘아일랜드계’가 아직 이단아처럼 간주되던 1960년 케네디가 급부상하는 것을 봤다. 바이든은 “내 청소년‧대학 시절 미국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존 F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JFK의 동생‧법무장관)가 바꾸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달변과 확신, 가늠조차 어려운 광대한 꿈에 압도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JFK의 미 대통령 당선으로 온나라가 흥분했던 아일랜드를, 바이든은 2016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아일랜드는 내 영혼에 박힌 고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