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고의 베테랑 뉴스앵커가 하버드대학교 교수직을 제안 받고 방송국을 그만뒀지만, 이메일 스캠(Scam·사기)으로 밝혀졌다고 뉴욕타임스가 17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사기범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여러 인도 여성 언론인들에게 비슷한 수법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21년간 인도의 유력 언론사 뉴델리방송(NDTV)에 근무하며 9시 뉴스를 진행했던 유명 여성 앵커 니디 라즈단(44)은 2019년 11월 14일 ‘멜리사 리브'란 하버드 학생으로부터 하버드 언론 세미나에 초청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곧 이어 이메일을 통해 ‘타시프 아흐메드'란 다른 학생을 소개 받았고, 아흐메드는 하버드에 언론학 교수 자리가 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라즈단은 관심을 보였고, 얼마 후 자신을 ‘바랏 아난드 부총장’이라고 밝힌 사람과 전화 인터뷰가 이뤄졌다. 하버드대에는 실제 바랏 아난드 부총장이 있기 때문에, 라즈단은 진짜 아난드 부총장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믿었다.
라즈단이 이 사기범들을 하버드대 관계자로 믿은 이유는 또 있었다. 사기범들은 작년 1월 ‘하버드 커리어 닷컴(HarvardCareer.com)’이란 웹사이트를 사들인 뒤, 이 주소를 이용해서 이메일을 보냈다. 실제 하버드대 인사부는 웹사이트는 ‘hr.harvard.edu’란 주소를 쓰지만, ‘하버드 커리어'(@Harvard_Careers)란 이름의 트위터 계정 등을 갖고 있다. 라즈단이 자신에게 추천서를 써줄 수 있는 사람들 명단을 제출하자, 사기범들은 ‘하버드커리어 닷컴'에서 발송된 공식적으로 보이는 이메일로 추천서를 업로드할 링크를 보냈다. 라즈단은 상대가 요구하는대로 여권 정보, 의료 기록, 은행 계좌 번호 등도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라즈단은 자신이 하버드대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버드대 교수가 됐다고 믿은 그는 NDTV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자신이 하버드대에서 일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는 사실도 주변에 모두 알렸다. 라즈단은 뉴욕타임스에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라즈단이 하버드대에서 일하게 됐다는 소식이 널리 퍼진 지난 1월 어느 날 밤, 진짜 하버드대 부학장이 라즈단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당신 이름이나 당신을 임명했다는 사실에 대한 어떤 기록이나 지식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라즈단은 곧 자신이 온라인 취업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사실을 공개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순진한 라즈단만이 사기를 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몇 달 사이에 인도의 다른 여성 언론인들의 증언에 의해 비슷한 사기 시도가 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기범들은 여러 개의 트위터, 페이스북, 지메일과 왓츠앱 계정을 사용하며 여성 언론인들에게 접근했다. 2017년 인도 내무부 장관 아들의 사업과 관련한 특종을 했던 여성 언론인 로히니 싱은 2019년 8월 중순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사과정 학생이라고 자신을 밝힌 ‘타시프 아흐메드'란 사람으로부터 트위터 메시지를 받았다. 아흐메드는 자신도 싱의 고향 출신이라며 친근감을 나타내면서, 싱을 하버드대의 미디어 컨퍼런스에 초청했다. 아흐메드는 ‘알렉스 허시만'이란 이름의 동료를 소개해줬고 허시만은 2019년 8월 19일 지메일 계정을 이용해 싱에게 연락을 취했다. 싱은 허시만이 하버드 공식 이메일 계정인 Harvard.edu 대신 지메일을 쓴 것, 아흐메드와 허시만의 전화 번호가 모두 미국 번호가 아닌 점을 의심하고 연락을 끊었다.
자이나브 시칸데르란 또 다른 인도의 여성 언론인도 비슷한 시기에 타시프 아흐메드란 사람으로부터 하버드대 미디어 컨퍼런스에 초청하고 싶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시칸데르는 타시프와 왓츠앱 등을 이용해 연락을 주고 받았다. 타시프는 자신이 하버드대가 있는 미국 보스턴 지역에 있다고 했지만, 전화번호는 아랍에미리트의 국가번호로 시작했다. 시칸데르는 타시프가 두바이에서 산 적 있는 외국 학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칸데르도 앞서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허시만이란 사람을 소개 받았다. 사기범들은 하버드대가 모든 비용을 댈 것이라며 “이 호텔의 이 방이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 시칸데르는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학장의 공식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초청장이 오지 않자 연락을 끊었다.
사기범들은 이들 외에 익명으로 남기를 요청한 다른 여성 언론인에게도 접근했다고 한다. 이 언론인은 아랍에미리트 국가번호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의심스럽게 생각해 연락을 끊었다. 사기범들은 또 인도 여당의 여성 대변인인 니가트 압바스에게도 접근했는데 이때는 하버드대 직원의 이메일 서명과 하버드대 웹사이트에서 복사한 레터헤드 등을 이용했다고 한다. 보통의 사기범들과 달리 이들은 돈을 요구하거나 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고, 최종 목적은 아직 불분명하다.
뉴욕타임스는 “사기범들은 흔적을 성공적으로 덮었다”면서 스탠포드대와 토론토대 연구소의 공동 연구에도 불구하고 사기범들의 정체를 밝히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다만 이들이 모두 정치 관련 뉴스를 다루는 언론인이고, 싱과 시칸데르 등은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및 힌두 내셔널리즘 성향의 정부를 비판하는 보도를 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또 “분명히 하버드대 측에 사기 시도에 대한 경고를 전한 피해자도 있었는데 왜 하버드가 사기를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