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교착 상태에서 빠지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1000㎞에 달하는 전선에서 막대한 포탄을 소비하는 포격전을 치르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하루에 수천 발의 155㎜ 포탄을 쏘며, 한 달 평균 9만 발을 소진한다 양측은 또 봄을 맞아 각각 대공세를 준비 중이다. 우크라이나는 2만8000명의 신병을 모집했고, 러시아는 4월에 또 동원령을 내린다. 지금까지 러시아군 전사자는 20만 명 이상, 우크라이나군도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두 나라 모두 대포와 같은 재래식 무기와 탄약이 부족하다. 전쟁의 승패가 어느 쪽이 신속하게 무기를 재충전하느냐에 달렸다. 로이드 J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16일 우크라이나가 춘계(春季) 대반격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하고 신속하게” 필요한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자국 내 무기 비축분을 비우고, 한국과 이집트, 인도 등에 155㎜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해 달라고 설득 중이다. 올해 미국의 국방비는 8006억 달러(약 1042조 원)로, 2위 중국(2933억 달러)부터 10위 한국(502억 달러)까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도 많다. 아무리 우크라이나 전쟁이 소모전이라고 해도, 왜 이렇게 무기 재고량 부족에 허덕이는 것일까.
미 언론과 의회 보고서, 씽크탱크들은 1991년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정부가 주도해 온 미 방위산업체들의 지속적인 합병과 이에 따른 미 방위산업 기반의 축소, 이라크 전쟁 이후 재래식 무기보다 첨단 무기를 선호해 온 군사 교리 등이 그 배경에 있다고 말한다.
◇6ㆍ25 전쟁 이래 최대의 포격전
16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서 160문의 155㎜ 포와 100만 발의 포탄을 보냈다. 이밖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서방 국가들이 추가로 보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우크라이나군이 소진하는데 1년도 안 걸린다. 다른 재래식 포탄도 마찬가지여서, 현재 7개월째 양측이 소모전을 벌이는 우크라이나 동부 바흐무트에선 우크라이나군의 T-80 탱크는 포탄이 바닥났다고 한다. 미국과 동구권 국가들은 소련제 포탄을 공급했다. 우크라이나의 한 지휘관은 뉴욕타임스에 “러시아의 T-90 탱크를 불능화했지만, 상부에서 포탄을 아끼라고 해서 파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작년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기 전까지, 미국의 155㎜ 포탄 생산량은 한달에 1만4400발이었다. 미국의 기존 전쟁 수행 방식에선 ‘충분한’ 수치였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나고 포탄 생산량을 한 달 2만 발로 늘렸다. 뉴욕타임스는 “6ㆍ25전쟁 이래 최대의 포격전을 맞아, 미 국방부는 월 생산 9만발까지 확대하려고 하지만 이는 2년 뒤에나 가능하다”고 보도했다.
미국 육군은 부랴부랴 앞으로 15년간 매년 10억 달러를 써서 미국 정부가 소유한 재래식 탄약 제조 시설을 자동화ㆍ현대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는 공장 라인을 새로 개설하고 근로자를 고용해야 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미국 내 탄약 제조공장, 2차대전 말 86곳에서 5곳으로
작년 11월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50구경(12.7㎜) 이하ㆍ20~40㎜ㆍ50~155㎜ 등을 만드는 미국의 탄약 공장은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86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정부가 소유하고 외부업체 계약으로 운영되는 공장 5곳으로 축소됐다. 이 보고서는 “재래식 탄약 생산 시설은 평균 80년 이상 됐고, 2차 대전 당시의 건물에서 여전히 그 당시 제조 장비를 쓴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이들 공장이 확충돼도, 1940년대 미 국방부가 징발했던 무기 생산시설 능력엔 크게 못 미친다”고 밝혔다. 미 연방하원 국방위의 공화당 의원 롭 휘트먼은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에게 ‘스푸트니크 충격’과 같은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소련은 1957년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쏴 올려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이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재래식 무기와 탄약은 대부분 미군 비축분에서 나왔다. 미국 재고는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미 국방부는 재고량에 대해 공개하지 않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과 서방이 우크라이나군에 제공한 “155㎜ 포의 3분의1도 현재는 수리가 불가피해 동원될 수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미국, 우방국들에 포탄 제공 설득했지만
미국 씽크탱크 CAN의 러시아 연구원인 마이클 코프먼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충분한 대포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지적(知的) 연습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해외 주둔 미군에 대한 물자 보급을 중단하고 이를 우크라이나로 돌리는 한편, 한국ㆍ인도 ㆍ이스라엘 등에 포탄을 제공하도록 설득했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들 나라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미국은 한국산 포탄이 우크라이나로 가지 않는 확약을 하고, 155㎜ 포탄 20만 발을 구입하는 선에서 그쳤다. 20만 발은 우크라이나 군이 두 달 남짓이면 소진하는 양이다.
WSJ는 “미국은 작년 여름 한국이 체코에 155㎜ 포탄을 우회 판매하는 방안을 주선했고, 작년 11월에는 더 큰 딜을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8일 이집트를 방문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155㎜ 포탄과 소련 시절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확답을 받지 못했다.
러시아 전차를 파괴하는 휴대용 미사일로 유명한 재블린(Javelin)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8500개의 재블린 제공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물량은 미군 재고에서 온다. 합작 기업을 통해 재블린을 생산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방위산업체인 레이시언과 록히드 마틴 측은 “갑자기 양산(量産)할 수 있는 마법(魔法)은 없으며, 양산은 2026년이 돼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미 국방부, 냉전 끝나자 방산업계에 구조조정 강요
1993년 9월15일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레스 애스핀은 당시 미국의 주요 방위산업체 대표 20여 명을 비밀리에 펜타곤으로 불러 ‘최후의 만찬(Last Supper)’을 했다. 요지는 냉전이 종식돼, 앞으로 5년간 국방 예산은 600억 달러 삭감될 것이니, 미 방위산업계도 인수ㆍ합병을 통해 구조조정을 하라는 통보였다.
다음날 애스핀 장관은 대대적인 군비 축소를 발표했고, 이 만찬은 미 언론과 방산업계에서 ‘최후의 만찬’이라 불렸다.
미 국방예산은 실제로 1991년부터 1996년까지 15% 이상 감소했다. 소련이 사라졌으니, 대형 전함을 만들 이유도 사라졌다. 미 방산업체들은 최대 고객이자 규제 당국인 국방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미 방산업계의 슬림다운(slim down)을 주도했던 윌리엄 페리 차관은 1995년 국방 장관이 된 뒤 “결과적으로 경쟁을 줄이고, 무기 가격만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고 정책 오류를 시인했다.
미 군사전문 웹사이트는 워온더락스(warontherocks.com)는 16일 “미국이 현재 군수품 부족을 겪고 있는 것은 지난 20년간 계속된 추세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즉, 경쟁국(소련)이 소멸되면서, 미군 축소와 방위산업 통합, 예산 배정의 우선순위 변경으로 이어졌다. 또 첨단 무기를 앞세워 1991년 걸프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9ㆍ11테러 이후 대(對)테러작전으로 우선 순위가 달라지면서 재래식 무기ㆍ탄약에 생각이 바뀌었다.
미국은 군사ㆍ기술적 우위와 전략, 초기 화력 집중으로 적의 재래식 전쟁을 압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가 침공했을 때에도, 서방의 많은 군사 전문가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을 쉽게 궤멸하고, 우크라이나는 전역에서 산발적인 게릴라 전술로 항전(抗戰)할 것으로 예상했다.
◇전함 제조사 8개→2개, 전술 미사일 제조사 13개→3개로
작년 2월 미 국방부는 “국방 산업 기반의 통합이 국가 안보에 위험을 제기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 국방부와 1차 계약을 맺는 주요 방산업체는 1990년 51개에서 지금은 록히드 마틴ㆍ레이시언ㆍ제너럴 다이내믹스ㆍ노스럽 그러먼ㆍ보잉 5개 사로 줄었다. 그 결과, 전술미사일 제조사는 13개에서 3개로, 고정익 전투기 제조사는 8개에서 3개로, 군사 위성 제조사는 8개에서 4개로, 전함 제조사는 8개에서 2개로 줄었다.
또 이들 거대 방산업체들은 자동차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많은 부품 생산을 외부 협력업체로 돌린다. 그러나 2016년 6만9000개였던 협력업체 수도 2021년 5만5000개로 줄었다. 따라서 이들 협력업체의 공급라인에서 인력ㆍ반도체ㆍ부품 조달 등의 차질이 발생하면, 미국 주요 무기 생산이 ‘보틀넥(bottleneck)’을 겪게 된다. 미 국방부의 산업 기반 담당 부 부(副)차관보인 할리마 나지브-로크는 지난 1월 “주요 무기의 생산 능력에서 미 국방부가 소수의 업체들이 갈수록 의존하는” 위험성을 경고했다.
실제로, 대전차 미사일인 재블린의 로켓 모터를 생산하던 업체는 과거 5~6개였지만, 지금은 2개에 불과하다. 한 곳에서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 생산량에서 큰 차질이 불가피하다.
바이든 행정부가 작년 1월 재블린을 생산하는 록히드 마틴이 재블린의 로켓 모터를 생산하는 에어로젯 로켓다인을 인수하려고 하자 제동을 걸어 무산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