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대서양 양안(兩岸)과 호주에 미디어 제국을 구축한 루퍼트 머독(92)이 11월에 70년 간 직접 운영해왔던 뉴스코프와 폭스코프 두 개 회사의 이사회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뉴스코프(News Corporation)은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포스트, 영국의 타임스와 선, 호주 신문들과 대형 출판사 하퍼 콜린스를 보유한 신문ㆍ출판 기업이고, 폭스코프(Fox Corporation)는 24시간 뉴스채널인 폭스 뉴스와 폭스 스포츠, 종합 채널인 폭스 TV를 거느린 방송 기업이다.

머독의 이날 발표로, 장남 라클런(Lachlanㆍ52)은 이미 회장과 대표이사(CEO) 직을 맡고 있는 폭스코프에 이어 뉴스코프에서도 단독으로 회장이 된다. 장남이 머독 집안의 신문ㆍ출판과 TV 방송 부문을 모두 거머쥐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미디어 전문가들은 루퍼트 머독이 평생 구축한 미디어 제국의 미래는 그가 죽은 뒤에 큰 변화를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2016년 영국 런던의 세인트 브라이드 처치에서 열린 아버지 루퍼트 머독의 세번째 결혼식에 참석한 장남 라클런(왼쪽)과 차남 제임스 머독/로이터 연합뉴스

그 배경에는 장남과, 후계 경쟁에서 밀려난 둘째아들 제임스(50)의 반목(反目)이 존재한다. 두 사람은 아버지 머독의 두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났지만, 정치적 이념이나 언론관은 완전히 다르다. 아버지와 장남은 극도로 보수적이지만, 차남은 보다 리버럴 쪽이다. 형제는 서로 얘기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두 기업을 통제하는 패밀리 트러스트(family trust)에서 머독이 쥐고 있는 의결권 4표는 그의 사망 뒤에 장남과 차남, 두 딸 등 4명의 자녀에게 골고루 1표씩 돌아간다. 따라서 형제 간에 어떻게 동맹을 맺느냐에 따라, 장남 라클런의 지위는 크게 흔들릴 수 있다.

벌써부터 아버지 사후에 차남 제임스가 누나들과 연합해 ‘형제의 난’을 일으키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 무성하다. 그는 평소 지인들에게 “누나들과 합쳐 폭스 뉴스를 보다 중도 우파적인 매체로 바꾸겠다”는 말을 했다.

◇자녀들 경쟁시켰지만, ‘속마음’은 장남

아버지 머독은 표면적으로 다윈의 적자생존을 주장하며, 자녀들을 경쟁시켰다. 머독은 네 번 결혼했다. 첫 결혼에서 딸 프루던스(65), 두번째 결혼에서 딸 엘리자베스(55)와 두 아들 라클런과 제임스를 얻었다.

이밖에 세번째 아내 웬디 덩과의 사이에서 두 딸 그레이스(22)와 클로에(20)를 낳았지만, 이들은 대학생이고 패밀리 트러스트에서 의결권이 없다.

역량이 가장 뛰어난 것은 엘리자베스였다고 한다. 그러나 머독은 장자상속을 원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 기업을 떠나 독자적인 TV 프로덕션사를 세워 성공했다.

장남 라클런은 우파 성향, 신문에 대한 열정, 조국 호주에 대한 사랑 등 아버지와 공통점이 많아,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를 독차지했다. 그러나 라클런은 암벽 등반을 즐기며 보다 여유 있는 삶을 원했다. 결국 2005년 아버지의 폭스 뉴스 동업자였던 CEO 로저 에일스와 충돌하고는, 아버지 기업을 떠나 호주로 갔다.

자연스럽게 후계자는 차남 제임스가 됐다. 그는 매우 똑똑하다는 평을 받았고, 폭스 TV에서 크면서 기업의 탄소배출 제로 정책을 추구했다.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훌루, 내셔럴 지오그래픽 채널과 같은 브랜드를 키웠다. 그러나 그는 리버럴 성향이었고, 머독의 뉴스 기업이 리버럴 엘리트들에게도 존중 받는 매체가 되기를 원했다. 당연히 아버지와 충돌이 잦았다.

결국 아버지는 2015년 호주에서 편히 살던 장남을 설득해서 다시 회사로 불러들였다. 장남은 아버지 머독과 함께 폭스코프의 공동 회장이 됐다. 차남 제임스는 폭스코프의 대표이사(CEO) 직을 맡았지만, 그의 지인들은 “제임스는 자신이 공들인 회사가 형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치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제임스는 수년 뒤 아버지 회사를 떠났고, 리버럴 미디어 기업에 투자하는 ‘루파(lupa)’라는 투자사를 차렸다. 루파는 로마 건국 신화에 나오는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키운 어미 늑대의 이름이다.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초대 왕이 된다.

미디어 가문의 암투를 다룬 HBO의 드라마 '석세션.' 루퍼트 머독 일가의 얘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HBO

현재 방영 중인 미국 HBO의 블랙 코미디 드라마 석세션(Successionㆍ계승)은 루퍼트 머독 집안의 암투를 쏙 빼닮았다. 이를 놓고도, 형과 동생은 서로 상대방이 가족의 내막을 드라마 작가에게 흘린다고 서로 비난한다.

◇형은 트럼프, 동생은 바이든 지지

두 아들은 아버지 머독이 2017년 폭스코프의 영화ㆍTV 스튜디오, 연예산업 부문인 ‘21세기 폭스’를 디즈니에 710억 달러를 받고 매각하는 과정에서 크게 충돌했다.

아버지는 신문과 뉴스ㆍTV 방송에만 올인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폭스코프에서 일하던 차남 제임스는 이 매각이 성사되면, 디즈니 소유의 21세기 폭스에서 일하기로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과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장남만 쳐다보는’ 아버지를 벗어나, 한껏 기량을 펼치겠다고 생각했다.

장남 라클런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가 설득해 마지못해 복귀했더니, 아버지와 동생이 나중에 자신의 ‘왕국’이 될 것 중에서 큰 덩어리를 팔아버린다고 생각해 맹렬히 반대했다. 라클런은 대놓고 두 사람에게 “이 딜을 관철하면, 다시는 두 사람과 얘기 안 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컸는지, 그는 공황발작을 일으켜 로스엔젤레스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딜은 진행됐고, 장남 라클런은 뉴스코프와 폭스코프의 최고운영임원(COO)가 됐다. 차남은 아버지 기업을 떠났다.

루퍼트 머독은 트럼프를 포함해, 미국과 영국의 권력층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그가 소유한 영국의 더 타임스는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총리뿐 아니라, 1997년과 2001년 총선에선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를 지지했다.

루퍼트 머독은 2016년 미국 대선의 공화당 경선에선 트럼프가 지명되지 않도록 자신의 언론사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일단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자 그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는 2020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선거 부정을 주장하자, 측근에게 보낸 이메일에선 "미친 소리(crazy stuff)"라고 평했다./로이터 연합뉴스

라클런은 이런 인맥 형성에선 조금 거리를 두지만, 보수적이다. 아버지 머독은 리버럴 성향의 민주당 인사들을 “자기 뱃속만 챙기는 관료들과 엘리트층”이라고 공격한다. 장남 라클런 역시 2024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될 것이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폭스 뉴스를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반대로, 차남 제임스는 “폭스 뉴스가 백인우월주의와 대선 부정(不正) 음모론을 퍼뜨리고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등 미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주변에 말한다. 그는 2020년 뉴스코프 이사회에서 사임하면서도 “뉴스 매체의 편집 방향과 일부 전략적 결정에 대해 의견이 달라 사직한다”고 밝혔다.

그는 2021년 1월6일 미 의회 건물의 폭도 난입 사건에 대해서도 폭스 뉴스를 간접적으로 지칭하며 “시청자들에게 부정 선거라는 거짓말을 퍼뜨린 뉴스매체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부부는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게 1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알 수 없는 자녀 표의 행방

차남 제임스는 두 누나를 설득해서, 폭스코프와 뉴스코프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매체의 성향을 지금의 우파 편향에서 중도 우파로 바꾸겠다는 얘기를 주변에 한다.

한편, 장남 라클런의 일부 지인은 “그가 이 왕좌(王座)를 계속 원하는지 의문”이라며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에서 회사를 맡은 것이지 사후엔 모른다”고 말한다. 라클런은 지금도 매일 실내 암벽등반 체육관을 간다고 한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그러나 두 누나는 전혀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의 정치 성향은 리버럴이지만, 아버지 루퍼트와 라클런과 친밀하다. 셋이서 수퍼볼 게임을 관전할 정도다. 그는 또 2011년 영국의 머독 소유 신문인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 기자가 유명인사ㆍ정치인들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나 결국 신문이 폐업했을 때에는, 아버지에게 책임을 물어 제임스를 해고하라고 말했다.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프루던스는 가족 비즈니스와는 완전히 결별한 상태라, 그의 표는 향방을 짐작할 수도 없는 ‘와일드 카드’다. 현재로선 차남 제임스는 ‘외로운 늑대’다.

◇아버지 머독, 한때 ”나는 불멸(不滅) 확신한다”고 했지만

루퍼트 머독의 재산은 82억6000만 달러(블룸버그)~174억 달러(포브스)로 추정된다. 그의 어머니는 103세에 숨졌다. 머독은 2000년에 전립선암을 이겨낸 뒤에는 “이제 나는 내가 죽지 않는다(immortal)는 걸 확신한다”고 말했다. 21일 이사회 사직서에서도 “우리 기업은 나만큼이나 강건하다”고 썼다.

머독은 명예회장이 된 뒤에도, 회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할 것임을 예고했다.

“방송, 우리가 발행하는 신문, 뉴스 웹사이트를 매우 비판적 시간으로 보고, 우리가 출판하는 책을 큰 관심을 갖고 읽고, 여러분에게 내 생각과 아이디어를 조언하겠다. 금요일 늦은 오후 시간에, 당신들이 일하는 나라 사무실에서 나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머독은 그러나 최근 수 년간 크고 작은 병치레가 잦아졌다. 작년 6월에는 코로나에 감염돼 1주일 넘게 입원 치료를 받으며, 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최근 수 년 간 두 차례의 폐렴, 척추 골절, 심장 세동, 아킬레스건 파열 등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