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6월 8일 베트남 남부의 짱방 마을에, 베트남 공군기들이 네이팜(Napalm)탄을 투하했다. 베트콩들이 이 곳에 숨어 있다고 잘못 알고 폭격했다. 마을에서 불에 탄 옷을 벗고 화상을 입은 나체의 여자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울면서 뛰쳐나왔다. 뒤에는 베트남 군인들이 따랐다.

1972년 6월 베트남 공군기가 베트콩 은신처로 잘못 알고 네이팜탄을 투하한 짱방 마을에서 온몸을 드러낸 9세 여아와 아이들이 울면서 뛰쳐 나오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AP 사이공 지국의 닉 웃은 다음 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AP

다음날 이 사진은 전세계 신문과 방송을 도배했고, 말 그대로 수억 명이 봤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조작된 사진 아니냐”고 흥분했지만, 결국 이 사진은 반전(反戰)의 아이콘이 됐고 다음 해 1월 미국이 파리에서 공산주의 정권인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는 기폭제가 됐다.

이 사진은 AP 통신사의 당시 사이공(현 호찌민 시) 지국에 속한 스물한 살의 베트남인 기자 닉 웃이 찍은 것이었다. ‘전쟁의 공포(The Terror of War)’ ‘네이팜 걸(Napalm Girl)’로 불리는 이 사진으로, 닉 웃은 퓰리처상을 받았고 보도 사진계의 전설이 됐다. 사진 속 나체의 아홉 살 ‘네이팜 걸’인 판 티 킴 푹은 이후 캐나다에서 소설가가 됐고, 유네스코의 굿윌(Goodwill) 대사로 활동했다.

트럼프 행정부 1기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네이팜 걸' 사진을 헌정하는 닉 웃./인스타그램

두 사람은 이후 함께 전세계를 돌며 평화의 메신저로 활약했고, AP 사진기자 웃은 이 사진을 프란체스코 교황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헌정했다.

그런데, 1월 23일부터 2월 2일까지 열리는 미국 유타 주의 선댄스 영화제에선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이 처음 개봉됐다.

AP 기자 닉 웃이 아니라, 미국 NBC 방송과 AP 통신에 필름을 제공하고 건당 수수료를 받던 베트남인 프리랜서 사진기자 응우옌 타인 응에(86)가 찍었다는 것이다. 영화 제목도 이런 프리랜서 기자를 뜻하는 ‘스트링어(Stringer)’다.

응우옌은 영화에서 “그날 닉 웃을 현장에 차로 데려갔고 나도 사진을 찍었다. AP 통신의 사이공 지국에 내가 찍은 필름 두 통을 가져갔고 우리가 ‘빅 가이(big guy)’라고 부르던 AP 지국의 미국인 사진부장이 이 벌거벗은 여아(女兒) 사진 한 장을 선택하고 20달러와 빈 필름 두 통을 줬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진’이라고 꼽은 ‘네이팜 걸’을 실제로 찍은 사람은 닉 웃이 아니라, 응우옌이라는 얘기다.

이 모든 논란의 시작은 당시 AP 사이공 지국의 사진 에디터였던 칼 로빈슨(81)이었다. 그는 2022년 12월 미국의 한 비영리 보도사진 교육기관에 “이 사진을 찍은 기자 이름이 바뀌었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 비영리기관의 대표는 이후 2년 간 사실 관계를 조사했고, 이를 다큐멘터리 영화 ‘스트링어’에 담았다.

로빈슨의 주장은 이렇다. “그날 여러 사진을 인화해 지국 사진부장인 호스트 파스(Faas)에게 보여줬는데, 여자아이가 벌거벗은 채 정면에서 달려 나오는 모습은 자극적이어서 제외했다. 그리고 AP 기자 닉 웃이 찍은, 이 여자아이가 달려가는 옆모습을 찍은 사진을 추천했다. 그런데 파스는 ‘바로 이 사진’이라며 스트링어가 찍어온 사진을 짚었다.”

그래서 자신이 잘 모르는 그 스트링어의 이름을 확인해 사진 설명을 쓰려고 공책을 들추는데, 사진부장 파스가 “닉 웃으로 해(Make it Nik Ut). 우리 기자 이름으로”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로빈슨은 영화에서 “지난 50년 간 이 짐을 지고 살았고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닉이 그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직접 증언해줄 사진부장 파스, 사진을 인화하는 암실(暗室) 책임자는 모두 숨졌다.

미국 유타주에서 열린 선댄스 영화제에 참석한 응우옌(왼쪽)과 과거 AP 사이공 지국의 사진에디터 칼 로빈슨

로빈슨은 왜 이제서야 이를 공개한 것일까. 또 퓰리처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저명한 사진기자인 AP 사진부장 파스는 왜 굳이 그런 ‘이름 바꾸기’를 했을까.

로빈슨은 “파스 생전(2012년 사망)에 그를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파스는 사이공 지국의 사진기자였던 닉 웃의 형이 자신의 지시로 현장 취재를 갔다가 베트콩의 총에 맞아 숨졌기 때문에, 닉 웃의 가족에게 늘 마음의 짐을 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형의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 뒤 사이공 지국을 찾아온 열네 살의 웃을 정식 고용해 사진을 배우게 한 것도 파스였다. 그러나 로빈슨은 2020년에 자신의 회고록을 내면서도 정작 이 ‘이름 바꾸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AP 통신은 1월15일 23쪽에 달하는 자체 보고서를 통해 영화 ‘스트링어’의 주장을 반박했다. AP 통신은 당시 사이공 지국에 근무했거나 취재 현장에 있었던 7명을 인터뷰했고, 이들은 모두 “닉 웃이 찍었다”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라이프 잡지 기자 데이비드 버닛은 “내가 쓰는 라이카 카메라는 필름 로딩(loading)이 까다로워 한참 버벅대고 있었는데, 닉이 우리들보다 먼저 뛰어 나갔고 킴 푹과 다른 애들이 연기 속에서 나오는 것을 찍었다”고 했다.

버닛은 ‘네이팜 걸’ 사진이 나온 지 40년이 되던 2012년 6월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도 “나는 당시 AP 지국의 암실을 사용했는데, 닉이 암실에서 가로 5인치ㆍ세로 7인치 크기로 인화한 젖은 킴 푹 사진을 들고 나왔다. 내가 그 사진의 최초 목격자”라고 썼다.

이번에 논란이 일자, 잡지 배너티 페어(Vanity Fair) 인터뷰에서 “사진부장 호스트 파스가 ‘닉 웃, 오늘 잘했어’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이름을 바꿨다면, 그가 그런 말을 했을까”라고 했다.

AP 보고서는 “새롭고 설득력 있는 반대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AP는 닉 웃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사진을 찍었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라이프 기자 버닛과 사진의 주인공 킴 푹, 사진을 찍은 닉 웃은 모두 영화 ‘스트링어’ 제작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닉 웃은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과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닉 웃의 변호사들은 “로빈슨이 1978년 해고된 이래 AP 통신에 줄곧 앙심을 품고 있었고, 그의 과거 동료들은 로빈슨이 불만이 많았고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한 사진 법의학 분석팀이 그날 현장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 이미지 50여 건을 분석해서 닉 웃이 그 정면 사진을 찍을 위치에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놓기도 한다.

자신이 직접 사진을 찍었다는 응우옌은 왜 그동안 입을 다물었을까. 영화에서 그는 자신이 스트링어로 일했던 NBC 방송의 사이공 지국장과 AP 지국의 사진부장 파스는 매우 친했고, 공연히 문제를 일으켜 생계를 위협당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1975년 베트남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했다. “그 후엔 먹고 사는 게 급선무였다”고 했다.

응우옌도 이후 군사ㆍ전쟁 사진기자로 경력을 쌓았고, 자신의 사진들을 스크랩했다. 하지만, AP통신 사진부장으로부터 받았다는 ‘네이팜 걸’ 인화 사진은 아내가 아이들이 보기엔 너무 끔찍하다며 나중에 찢어버렸다고 말했다. 응우옌의 딸은 영화에서 “아빠가 처음에 냉장고 위에 올려놓은 사진을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 봤고, 다음날 그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응우옌은 “나는 그 사진을 찍으려 열심히 일했는데, 다른 사람이 모든 걸 가져갔다. 그[닉 웃]는 인정받고 많은 상을 받았고 베트남에서 유명해졌다. 증거가 없으니, 나는 제로(0)이고 그는 영웅이 됐다”고 한탄한다. 영화 제작진은 지금과 다른 시절, 미국과 다른 세계에선 사진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생계가 우선이었다며, 응우옌의 ‘침묵’을 옹호했다.

캘리포니아 주의 딸 집에 사는 그는 최근에 뇌졸중을 겪었고, 겨우 회복해 이번 선댄스 영화제에 참석했다. 그는 기자 인터뷰에서 통역을 통해 “내가 그 사진을 찍었다”며 웃었다.

‘네이팜 걸’ 킴 풋은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외삼촌으로부터 “닉 웃이 사진을 찍었고, 화상을 입은 너를 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는 영화 ‘스트링어’를 “나의 영웅에 대한 거짓된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2023년 4월 12일 작가 킴 푹(왼쪽)이 자신의 스페인어판 책 출간을 기념하며, '네이팜 걸' 사진을 찍은 퓰리처상 수상자 닉 웃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AFP 연합뉴스

AP 통신도 영화 ‘스트링어’의 제작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화 제작진은 그간의 조사 내용을 공개하는 대신에, 영화제 개봉 때까지 비공개를 요청했다. AP는 거부했다. 영화 제작진이 그동안 조사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자체 조사에서 ‘다른 진실’이 드러나면, 영화 공개 전에라도 밝히겠다는 입장이었다.

‘스트링어’ 영화 제작자는 워싱턴 포스트에 “AP나 다른 기관들이 뭐라 말하든, 우리는 그[응우옌]의 스토리를 전세계와 나눌 수 있게 돼 기쁘다. 그 역시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