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 백악관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트럼프에게 더 나은 외교 동맹(the better diplomatic ally)은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일 수 있다. 이 대표는 당파주의보다 국익을 우선시한다. 이재명과 트럼프, 두 현실주의자가 만나 놀라운 지정학적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3일 포린폴리시(FP) 홈페이지에 ‘한국의 보수는 트럼프의 지원을 받으려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이 1970년 창간한 FP는 포린 어페어스와 더불어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외 정책 간행물이다. 한일관계 개선과 북·중·러 적대시 외교를 윤 대통령 탄핵 사유로 삼은 1차 탄핵 소추안이 미 조야(朝野)에서 논란이 된 가운데, 55년 전통의 외교·안보 매체가 이 대표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면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조기 대선 가능성 속 “일본의 국방력 강화가 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최근 들어 외교·안보관이 180도 달라진 이 대표 입장에선 단기간에 이뤄낸 값진 성과일 것이다.

지난 3일 포린폴리시(FP) 홈페이지에 올라온 미셸 김 변호사의 글. /FP
포린폴리시(FP)에 글을 기고한 미셸 김의 소개란. /FP

여기에 고무된 민주당은 ‘미국 언론이 말하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란 제목의 홍보 자료까지 제작해 배포했다. 지난달 트럼프 취임식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 등에 대해 “트럼프와의 보잘 것 없는 관계(tenuous ties)를 자랑하며 워싱턴으로 향했다”는 문구까지 빼놓지 않았다. 채현일 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내란 세력이 성조기를 흔들며 트럼프의 도움을 기대하며 몸부림치고 있지만, 정작 트럼프는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이 외신의 분석”이라며 “내란 극우세력의 맹목적 대미 의존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같은 당 박지원 의원은 “미국 외교전문 권위지의 흥미로운 기사”라며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이 JM(이재명 대표)를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MBC가 제작해 5일 보도한 2분 1초짜리 리포트의 제목은 이랬다. <”트럼프가 尹구원? 꿈 깨라”… 美 외교지 “그는 관심 없어”>

그런데 이 글은 FP의 편집진이 아닌 ‘미셸 김(Michelle Kim)’이라는 외부 인사가 기고한 것이다. FP나 디플로매트 같은 미국의 외교·안보 매체들은 전문가나 전직 관료는 물론 석·박사과정에 있는 대학원생, 인턴을 포함한 주요 싱크탱크의 연구원 등이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게 기고를 받아 싣고 있다. 분량 같은 기본적인 형식 요건을 충족하고 논거(argument)가 명료하면 글을 실어주는데, 이 매체들이 정답이 없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종의 공론장을 자처하는 성격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 후보로 맞붙은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FP에 각자의 외교 정책을 나란히 기고했다. 김씨의 자기소개를 보면 “서울에 있는 미국 변호사”라고 돼 있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탄핵 정국 직후 글을 쓰기 시작해 지난 두 달 동안 3건을 기고했다.

MBC가 제작해 5일 보도한 포린폴리시(FP) 기고문 관련 기사. /네이버 뉴스

언론사가 외부 인사의 원고를 받아 게재했다고 해서 그걸 그 언론사의 입장으로 볼 수 있냐는 건 다른 문제다. 그래서 상당수 언론이 외부 필자의 글을 실을 때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면책 조항 같은 걸 붙이기도 한다. FP가 원고를 모집하며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봐도 “정부 관계자가 아닌 이상 해외에 대한 우리의 관심사를 언급하는 내용을 보내지 말라” “FP의 독자는 전세계에 걸쳐있다”고 돼 있다. 게재를 허락한 언론이 글의 논지나 필자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의했을 수는 있어도, 김씨가 FP에 기고한 글에 “따옴표(quotation mark)”를 쳐서 FP가 보도한 것처럼 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몰랐으면 무지(無知)고, 알았으면 기만에 가까운 행동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MBC를 비롯해 FP 기고문을 인용한 대부분 국내 언론 기사를 보면 “FP가 ~라 했다” “매체가 전했다”는 문장만 반복됐을 뿐 이 글의 필자인 김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 외신 기고를 보도로 둔갑해 선전… 과거에도 여러 차례

지난 2022년 3월 2일 열린 대선후보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가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 옆을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정파적 시각을 가진 한국계 인사가 매체에 기고한 글을 그 매체가 보도한 것 마냥 둔갑시키고, 그 매체의 권위를 빌려 외교·안보 분야에서 정치적 선전을 하는 건 야권에서 종종 등장하는 초식이다. 이해식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8월 디플로매트 기고를 인용하며 “미 외교지가 윤 대통령에 친일(親日)을 넘어 종일(從日) 딱지를 붙였다”고 했다. 이 의원은 디플로매트를 인용했는데 이 역시 자체 보도가 아니라 자신을 ‘자유 기고가’라 밝힌 외부 필진이 쓴 것이었다. 이 ‘자유 기고가’의 이력을 보면 영국의 한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해 2019년 졸업했고, 이듬해 9월부터 1년 8개월 동안 계룡대 육군본부에서 통역병으로 일했다고 돼 있었다.

이 대표 역시 지난 대선 직전인 2022년 2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서 윤 대통령의 대북 ‘선제 타격’ 발언을 비판하며 “제2총풍을 시도하는 윤 후보가 한반도 전쟁 발발 가능성을 키우는 4대 요인의 하나라는 게 해외 군사전문가의 분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의회 전문 매체인 ‘더힐(The Hill)’ 기사를 공유했는데, 이는 기사가 아닌 한국계 미국인 교수가 ‘오피니언 기고가’ 자격으로 더힐에 기고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 글에는 “이 글에 게재된 입장은 기고자 개인의 의견이지 ‘더힐’의 시각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이 교수가 한달 전 “외교적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윤석열 후보보다 경기지사 경험을 가진 이재명 후보가 미국의 국익에 더 안전할 것”이라 주장한 사실도 알려져 논란이 일었고, 이 문제는 당시 대선 후보 토론에서도 거론됐다.

포린폴리시(FP) 기사와 관련해 더불어민주당이 제작해 배포한 홍보 자료.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