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3년 6개월간 억류돼 있던 미국인 마크 포겔이 11일 극적으로 석방됐다. 러시아 주재 미 대사관 직원이자, 모스크바 소재 미국 학교 교사였던 포겔은 2021년 8월 여행 가방에 의료용으로 처방 받은 마리화나를 소지했다가 마약 밀수 혐의로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다. 작년 8월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와 대규모 수감자 교환을 할 때 명단에서 제외되자, 트럼프는 포겔 석방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취임 22일 만에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번 석방 협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인공은 바로 ‘트럼프의 40년 지기’이자, 미 중동 특사인 스티브 위트코프(68)다.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의 억만장자인 그는 외교 경험이 전무하지만, 트럼프 2기에서 핵심 특사를 맡아 굵직한 성과를 내고 있다. 트럼프 취임 직전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 협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 쌓아온 ‘협상 기술’을 외교 무대에서 한껏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트코프는 직접 자신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 포겔을 태워 왔다. 트럼프는 이날 밤 10시 30분 눈 내리는 워싱턴DC 백악관 앞에서 포겔을 기다렸고, 성조기를 목에 휘감은 포겔을 맞이했다. 트럼프는 눈물을 글썽이는 포겔의 손을 잡았고, 위트코프는 주인공을 위해 자리를 피하는 조연처럼 뒤로 물러섰다. 포겔은 기자회견에서 “나는 영원히 트럼프 대통령에게 빚을 졌다”면서 “스티브에게도 그렇다. 그는 정말 역동적인 사람으로 몸 전체에서 할 수 있다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고 했다. 트럼프 역시 “스티브가 해낸 일을 높이 평가한다”며 “내일 또 다른 억류자가 석방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이번 협상에서 러시아에 “많은 것을 주지 않았다”면서 협상이 공정하고 합리적이었다고 했다.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번 석방이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위한 협상에 물꼬를 텄다고 평가했다.
위트코프는 러시아 측과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 물밑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위트코프는 개인 전용기를 타고 가는 등 과거 국가 간 협상에서 볼 수 없던 방식을 보여줬다”며 “이는 러시아와의 새로운 비즈니스 방식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뉴욕 브롱크스 출신인 위트코프는 부동산 투자와 개발로 자산을 5억달러 이상 보유한 유대계 사업자다. 트럼프와는 40년 지기 ‘골프 친구’로, 작년 9월 플로리다주 골프장에서 트럼프가 2차 암살 시도를 겪었던 당시에도 함께 골프를 치고 있었다.
위트코프는 1980년대 뉴욕의 부동산 전문 법무법인에서 일하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를 고객으로 만나 인연을 맺어왔다. 그는 외교 경력이 전무했지만, 트럼프는 “위트코프는 비즈니스와 자선 사업 분야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라며 중동 특사에 임명했고, 지난달 대통령 취임식 준비위원장도 맡겼다.
지난달엔 지지부진하던 이스라엘과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간 휴전 협상을 담판 지었다. 위트코프는 휴전 협상 장소였던 카타르 도하에 머물다 유대교 안식일인 토요일(11일), 이스라엘로 건너가 네타냐후 총리를 만났다. 네타냐후가 안식일에는 만날 수 없다고 하자 위트코프는 “그런 건 상관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 만남이 성사됐다. 당시 그는 네타냐후에게 협상이 더 이상 지연돼선 안 된다고 강조하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면 집으로 돌아가라”고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트럼프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3일 인질 석방과 관련한 세부 조율을 거쳐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다. 위트코프는 2011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20대 아들을 잃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식을 잃은 양측 부모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신뢰를 얻었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트럼프가 공식 취임하기도 전에 협상이 마무리되자, 중재해 온 아랍권 국가에선 “트럼프 특사가 네타냐후를 한 번 만난 것이 바이든 대통령의 1년 노력보다 낫다”는 평가가 나왔다.
미 언론들은 “위트코프가 전통적인 외교 관례보다는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협상을 주도했다”고 분석했다. 막역한 친구인 트럼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도, 트럼프의 강력한 신뢰를 바탕으로 상대에게 압박과 유연함을 동시에 구사한다는 평가다. 향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서도 그의 활동 반경이 넓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일각에선 위트코프의 지나치게 실용적인 접근법이 장기적으로 외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위트코프는 트럼프의 ‘가자지구 개발 계획’ 아이디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외교 전문 매체 포린폴리시는 “위트코프가 부동산 거래처럼 국제 문제를 다루려 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티브 위트코프(Steve Witkoff)
트럼프의 40년 지기이자, 미국 중동 특사.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변호사가 되어 1980년대 뉴욕 부동산 전문 로펌에서 일하다 트럼프와 인연을 맺었다. 부동산 투자·개발 사업으로 5억달러 이상의 자산을 모았고, 1997년 설립한 부동산 투자회사 위트코프 그룹의 회장을 맡고 있다. 외교 경력이 전무한데도 이스라엘-하마스 간 휴전, 러시아 억류 미국인 인질 석방 등 성과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