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리 우주항공청(KASA) 우주항공임무본부장. /우주항공청(KASA)

한국 우주항공청(KASA)의 연구·개발(R&D)을 총괄하는 존 리 우주항공임무본부장과 김현대 항공혁신부문장이 미국 인사 접촉 내역 등의 활동을 미 법무부에 보고한 것으로 30일 확인됐다. 두 사람은 미 항공우주국(NASA) 출신 한국계 전문가로 지난해 5월 출범한 KASA에 채용됐다. 모두 미 시민권자다.

이들은 1938년 제정된 미국 ‘외국 대리인 등록법(FARA)’에 따라 활동 내역을 보고했다. 미 법무부 관할인 FARA는 외국 정부의 ‘대리인’으로서 한 활동을 미국인·외국인 모두 보고하도록 정해두고 있다.

본지 확인 결과 리 본부장은 지난 1월 31일, 김 부문장은 2월 28일 각각 법무부에 그간의 활동 기록을 제출했다. 두 사람의 보고 내용엔 급여를 포함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고, 어떤 용건으로 문자·이메일을 보냈는지 등이 세세하게 포함됐다. 리 본부장은 신고 기간인 지난해 8월 24일부터 지난 1월 24일까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설립한 스페이스X 등의 관계자를 접촉해 협업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KASA가 있는 경남 사천을 방문해줘서 고맙다며 NASA 관계자에게 이메일을 발송하고 NASA 연구자들과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내용 등이 실명으로 명단에 포함됐다. 국가 안보와 직결된 공공기관의 우주·항공 연구 책임자가 이메일·문자 발송 내역 등을 상대방의 실명과 함께 외국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래픽=김성규

◇ 월세부터 보잉 일자리 논의까지… 미국에 ‘깨알 보고’

리 본부장과 김 부문장의 활동 내역은 미 법무부 FARA 홈페이지에서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회원 등록이나 로그인 절차도 필요 없다. FARA 보고서에 따르면 리 본부장은 해당 기간의 임금과 함께 총 32건의 활동을 신고했다. 글로벌 방위 산업체인 록히드 마틴, 상업용 우주정거장을 개발하는 악시옴 스페이스, 우주 탐사 회사인 인튜이티브 머신스, NASA의 제트 추진 연구소·응용 물리 연구소, 콜로라도대·애리조나대 등의 “여러 인사와 소통하거나 협업을 진행했다”고 리 본부장은 접촉자 명단을 통해 밝혔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설립한 블루 오리진과 접촉했다는 내용도 있다.

지난해 9월 19일 NASA 본부를 찾아 빌 넬슨 국장을 만났고 같은 해 10월 국제 우주과학 콘퍼런스에 참석해 팸 언더우드 연방항공청(FAA) 국장, 발다 비크마니스 켈러 국무부 우주담당 국장 등과 대면 만남을 했다는 것도 포함됐다. 지난해 11월 케빈 머피 NASA 최고데이터책임자에게 KASA가 있는 경남 사천을 방문한 데 대한 감사 이메일을 보냈다거나, 지난 1월 해양대기청(NOAA)의 엘사예드 탈라트 박사가 우주연구협회 회장으로 임명된 데 대해 문자(text message)를 보내고 휴대폰 통화를 했다는 사실 등 소소한 소통 내역까지 공개됐다. 리 본부장이 이 기간 KASA에서 받은 월 급여(monthly wages)는 10만1284달러(약 1억4900만원)였다고 보고서엔 적혀 있었다.

리 본부장에 이은 KASA의 항공·우주 분야 2인자인 김 부문장도 급여 및 미 인사들과의 소통 내역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는 활동 내역 보고서에 지난해 9월 25일부터 올해 2월 28일까지 이사 비용을 포함해 6만9150달러(약 1억170만원)를 받았고, 매월 주택 비용을 429달러(약 63만원)씩 지원받았다는 내용을 적어 냈다.

김 부문장은 총 13건의 접촉 내역을 신고했다. 주로 미 대학 교수와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주한 미군 우주군 간부(대령·소령)들과 KASA에서 협업을 위한 대면 만남을 가졌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지난해 11월 28일 미국 대표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의 한국계 기술자를 KASA에서 만나 ‘일자리(job)’에 관해 대화했고, 약 2주 후 이메일로 후속 논의를 했다는 내용도 실명으로 적시됐다. 이 대화가 채용 관련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인사(人事)와 연관된 소통 내역이 실명으로 보고·공개된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해 8월 리 본부장의 외국 대리인 등록과 관련해 KASA는 본지에 “내국인(한국인)과의 만남은 보고 대상이 아니고, 기밀 등이 들어가지 않도록 미국에 자료 제출 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칠 예정”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보안 업무 관련 규정을 정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이 우주 선진국이자 우방이라 해도 한국 세금으로 급여를 받는 한국의 공공기관 고위 당국자가 누구를 언제 왜 접촉했는지까지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평가다.

경남 사천의 우주항공청(KASA) 청사 외관. /조선일보DB

한 외교 소식통은 “이제 막 발을 뗀 KASA가 한국계 미 전문가를 채용해 얻을 이점이 많기는 하지만 ‘우주 강국’을 목표로 하는 전 세계 주요국 중 고위 당국자 활동이 이 정도로 투명하게 공개되는 사례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신고 내역에 적시된 접촉 인사 등의 면면을 보면 KASA의 관심사가 드러나고 한미 협력 현황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도 여럿 있다. 예를 들어 리 본부장은 지난해 7월 NOAA 관계자와 ‘솔라 세일(solar sail·태양광을 동력으로 쓰는 우주선)’ 프로젝트 협업 가능성과 관련해 온라인 회의를 했고, 나사와는 달 탐사 프로그램과 관련한 협력 가능성을 역시 온라인 회의를 통해 타진했다고 FARA 서류를 통해 보고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엔 외국을 대리해 활동하는 인사들을 규제할 법이 없다. 지난해 국민의힘 최수진 의원이 외국 국가 등을 대리해 한국서 활동하는 이들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한국형 FARA’를 발의했지만 이후 논의가 진전되지 않은 상태다. 국가정보원도 비슷한 법을 추진하겠다고 지난해 밝혔으나 법안 발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아울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회원국 중 간첩죄 적용 대상을 ‘외국’이 아닌 북한을 뜻하는 ‘적국(敵國)’으로만 한정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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