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은 해냈어요. 아주 큰 이정표를 세운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여기서는 울지 않으려고 해요.”
지난 4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옅은 금발의 여성이 박수 속에 기념 메달을 목에 걸었다. 알코올과 마약에 찌든 삶을 청산하겠다고 선언하고 10년을 버텨낸 여성 베벌리 에이킨스(64)다. 그에게 메달을 걸어준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이은 미국 권력 서열 2위이자 에이킨스의 아들인 J D 밴스(41) 부통령이다.
밴스가 어머니가 술과 약물을 끊어낸 10년을 기념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초청해 기념행사를 연 것이다. 이는 앞서 지난해 7월 공화당 전당대회 때 밴스가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면서 청중들 앞에서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워싱턴 이그재미너는 “모자(母子)의 눈이 서로 마주친 순간, 마치 방 안에 둘만 존재하는 듯한 짧은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오하이오주(州)의 흙수저 출신으로 불우한 가정사를 딛고 법조인과 사업가로 성공한 뒤 마흔한 살에 부통령까지 오른 밴스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어머니 에이킨스다. 자신을 전국적인 인물로 만들며 할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진 2016년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에서 밴스는 어머니 에이킨스가 알코올·마약에 중독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썼다.
밴스가 여섯 살 때 이혼한 에이킨스는 간호사로 처방 약에 쉽게 접근할 수 있던 게 화근이 돼 약물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다섯 번의 결혼 생활을 거치며 약물과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 자살 기도 같은 문제를 끊임없이 일으켰다.
밴스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엄마가) 시속 100마일(약 161㎞)로 차를 충돌시켜서 나와 여동생을 죽일 거라 말했다”고 썼을 정도다. 이 때문에 에이킨스는 밴스를 비롯한 자녀들과 정상적인 관계 형성이 어려웠고, 밴스는 할머니 보니 밴스의 손에 주로 자랐다.
밴스는 할머니 보살핌 덕분에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 벤처 기업가,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했다. 아들의 자수성가를 지켜보던 에이킨스 역시 2015년 4월 4일 약물과 술을 끊었고, 이를 지켜낸 지 10년이 되는 날 아들이 일하는 백악관에서 축하를 받은 것이다.
에이킨스는 몇 년 전엔 간호사 면허를 다시 취득했고, 현재 오하이오주의 약물 남용 치료 센터에서 교육자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밴스는 “지난 10년 동안 어머니가 해낸 모든 일, 어머니가 여덟 살·다섯 살·세 살이 된 당신의 손주들과 어울릴 만큼 오래 살 수 있을지 몰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하다”며 “당신은 우리 아이들이 바랄 수 있는 이 세상 최고의 할머니”라고 했다.
이어 밴스의 여동생인 로리, 조카인 레이철 등이 올라와 에이킨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레이철은 “나는 솔직히 중독이란 감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도 “에이킨스가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용감하게 맞서 싸운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밴스 일가는 이날 백악관 로즈가든을 배경으로 단체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밴스를 통해 에이킨스에게 기념 주화를 전달하며 금주 10년을 축하했다. 친형을 알코올 중독으로 먼저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트럼프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강력한 약물 근절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약·알코올 중독에 찌든 미국 중서부 저소득층 백인들의 암담한 삶을 상징하는 인물과도 같은 에이킨스의 회복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 행정부에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에이킨스 같은 중서부 ‘러스트 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지대)’의 백인 계층이 현재로서는 트럼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권자층이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X 등 소셜미디어에서 이날 행사를 알리면서 “J D 밴스가 백악관에서 모친과 강력한 순간을 기념했다. 축하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