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우주항공청(KASA)에서 연구·개발(R&D)을 총괄하는 존 리 우주항공임무본부장이 최근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카운터파트인 미 항공우주국(NASA), 국무부 관계자들과 만나고 싱크탱크 주최 행사에 참석했다. NASA 출신인 리 본부장은 한국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에 외국(이 경우는 한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외국 대리인(Foreign Agent)’으로 등록돼 있다. 이 때문에 출장 기간 접촉·활동 내역 등을 빠짐없이 미 정부에 신고해야 한다. 반면 국내에는 한국인이 외국 정부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행정부·국회에 접촉해도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가 미비한 상태다.
리 본부장은 14일 워싱턴 DC에서 3년 만에 열린 제4차 한미 민간우주대화에 참석했다. 여기에는 케빈 김 국무부 동아태(EAP) 담당 부차관보, 라히마 칸다하리 국무부 과학·기술·우주 담당 부차관보, 캐런 펠드스타인 NASA 국장 등이 참석했다. 한미는 우주 탐사 및 과학 공동 연구, 지구 관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중지를 모았다. 1938년 제정된 미국 ‘외국 대리인 등록법(FARA)’은 외국 정부의 ‘대리인’으로서 한 활동을 관할 부서인 법무부(DOJ)에 모두 보고하도록 정해두고 있다. 이 때문에 리 본부장은 출장 기간 누구를 만나 무얼 했고, 어떤 형태로 언제 연락했는지 등을 소상하게 정리해 미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한국의 고위 당국자가 미국 출장을 와서 미국 측 인사들을 만나고 그걸 다시 정리해 미국 정부에 보고해야 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리 본부장은 15일에는 워싱턴 DC의 유수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한미 우주 협력 증진 방안’을 주제로 한 이벤트에 참석했다. 이 행사 자체는 민간 기관인 CSIS가 주최했지만 여기에는 NASA 측 관계자들이 두 명이나 패널로 참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리 본부장은 CSIS에서 NASA 관계자들과 접촉한 내역 역시 정리해 법무부에 신고해야 한다. 리 본부장은 이미 지난해 8월 24일~올해 1월 24일 사이 대리인으로 활동한 내역을 신고한 바 있다. 여기에는 이메일·문자 발송 내역과 함께 스페이스X, 악시옴 스페이스, NASA 제트 추진 연구소·응용 물리 연구소, 콜로라도대 등 우주 R&D를 총괄하는 그가 어느 기관의 누구를 접촉했는지가 소상하게 명시돼 있다. 한국 우주팀의 활동 기록을 사실상 전 세계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해 한국계 전문가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연구원이 FARA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미 당국은 최근 들어 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추세다. 워싱턴 DC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 중인 국내 일부 기관에도 ‘FARA법에 따른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을 하라’는 압박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5월 출범한 KASA의 김현대 항공혁신부문장 역시 NASA 출신 미국인으로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돼 있다. 이에 대한 KASA 측의 입장은 “유출될 정보보다 우리나라가 얻을 수 있는 실익이 더 크다”는 것이다. KASA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됐고 우주 기술 분야 역량이 어느 정도 축적될 때까지는 이런 식의 채용이 불가피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문제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는 외국을 대리해 활동하는 인사들을 규제할 법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국민의힘 최수진 의원이 외국 국가 등을 대리해 한국서 활동하는 이들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한국형 FARA’를 발의했지만 이후 논의가 진전되지 않은 상태다. 국가정보원도 비슷한 법을 추진하겠다고 지난해 밝혔으나 법안 발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아울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회원국 중 간첩죄 적용 대상을 ‘외국’이 아닌 북한을 뜻하는 ‘적국(敵國)’으로만 한정한 나라는 한국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