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드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 정부가 주요 로펌들로부터 10억 달러(약 1조4300억원) 상당의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받기로 합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15일 “트럼프의 공격을 받은 많은 로펌이 여기에 굴복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는 행정명령을 통해 과거 자신과 정치적 악연으로 얽힌 로펌을 콕 집어 제재를 가하고 팔을 비틀어 유리한 합의를 얻어내고 있다. 다만 이는 개인적인 차원의 복수를 뛰어넘는 것으로, 여기에는 대학과 더불어 로펌을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사회에 널리 퍼진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의 본산(本山)으로 보는 보수 진영의 시각이 깔려있다. 일종의 ‘문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 주요 로펌이 민주당 지지 성향을 띤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다국적 로펌이 밀집해 있는 워싱턴 DC의 K스트리트를 비롯해 상당수가 뉴욕, 로스앤젤레스(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이 높다고 여겨지는 곳들이다. 여기에 대부분의 로펌 파트너들은 진보 성향이 짙은 아이비리그 로스쿨 출신이고, 실제로 선거철 기부 내역을 봐도 대형 로펌의 경우 구성원 변호사들이 민주당에 돈을 기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한 소식통은 “트럼프 1기 때 트럼프에 줄을 댈 수 있을 만한 전관(前官) 다수가 워싱턴 DC의 로펌에 영입됐는데 이를 두고 여러 군데서 받느냐 마느냐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졌을 정도로 보수에 대한 거부감도 크다”고 했다.

특히 주요 로펌들은 오바마 정부 때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린 DEI의 확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많은 변호사가 이메일로 업무 소통을 하면서 자신의 성별을 ‘그 사람(They/them)’이라 표시하는데, 여기에는 남성·여성이라는 전통적 성별 범주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이들은 이른바 ‘프로 보노(Pro Bono)’라 불리는 공익(公益) 활동을 통해 인종, 성 소수자, 여성, 이민자 등과 관련된 DEI 사건에 적극 개입해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기에 ‘진보적’인 판결을 이끌어냈다. 지난주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해 1억2500만 달러 상당의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한 ‘커클랜드 앤 앨리스’는 과거 메릴랜드주(州)의 흑인 대학들이 주 정부 자금 지원에서 차별받은 소송에서 원고를 대리해 5억7000만 달러의 합의를 이끌어냈고, 수임료도 모두 관련 단체에 기부했다. 트럼프의 1호 타깃이 된 ‘퍼킨스 코이’는 90년대부터 ‘DEI 펠로십’을 운영하며 소수자 출신 로스쿨 재학생에게 장학금·인턴십 기회를 제공해왔다.

이런 이유로 미 보수 진영에서는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부터 로펌을 진보 사상 주입·전파의 경로로 보고 벼르는 분위기가 상당했다. 그리고 트럼프는 재집권 이후 ‘로펌과의 전쟁’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각 로펌의 DEI 관행에 대한 연방 정부 조사는 물론 특정 로펌을 콕 집어 정부 기관 출입, 정부 당국자 접촉 금지 등을 명령하면서 ‘밥벌이’가 어려워지자 고개를 숙이는 로펌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스카든 압스, 폴 와이스, A&O 시어먼 등 굴지의 ‘화이트 슈 로펌(White shoe law firm·흰색 더비 구두를 즐겨 신는 백인 남성들이 주로 일한다는 이미지가 강해 이런 이름이 붙음)’도 예외는 아니다. 또 중견 로펌 상당수가 기존 DEI 정책을 철회하고 홈페이지에서 ‘다양성’과 관련된 문구를 아예 삭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장학금·인턴십 프로그램도 여럿 없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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