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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腸)에서 마법의 호르몬이 분비된다. 장에서 시작된 신비로운 물질은 혈류를 타고 온몸을 여행하며 췌장과 위장, 뇌까지 스며든다. 호르몬 한 방울의 신호로 마침내 비만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다. 지엘피-원(GLP-1) 이야기다.

1983년 미국 시카고대 그레임 벨 교수는 인슐린과 반대 작용을 하는 글루카곤 유전자를 발견한다. 글루카곤 유전자 속에 또 다른 유전자가 숨어 있었는데, 그는 이를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으로 명명했다. 그때는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4년 후 이 호르몬을 쥐에게 투여하자, 인슐린 분비가 20배 증가했다. 기적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래픽=김성규

2005년 최초의 GLP-1 호르몬 계열 약제가 미 식품의약품안전청(FDA)에서 2형 당뇨병 치료제로 승인을 받는다. 그 약은 GLP-1 족보를 유지하며 발전을 거듭하다 비만 치료제 ‘삭센다’가 된다. 혁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같은 족보 ‘오젬픽’이라는 당뇨병 치료제가 나왔고, 용량을 더 올렸더니 획기적인 체중 감량이 일어났다. 이것이 화제의 비만치료제 ‘위고비’다.

체중 100kg인 사람이 기존 비만약을 먹으면 5㎏ 정도 빠진다. 삭센다를 맞으면 8㎏ 정도 빠진다. 위고비를 맞으면 15㎏ 빠진다. 최신 버전으로 개발 중인 ‘마운자로’를 맞으면 20㎏까지도 빠진다. 그동안 비만 치료를 위해 “적게 드시고 많이 움직이세요”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해도 꿈쩍 않던 체중이 GLP-1 파도를 맞더니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혈당도 인슐린을 쓸 때보다 더 크게 떨어진다. 그러니 기적이다.

우리가 삼킨 음식은 위에서 잘게 부서진 후 십이지장으로 조금씩 내려간다. 그 사이 췌장에서 소화액과 소화효소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면 탄수화물은 포도당과 같은 단당류가 되어 소장 속 장세포를 통과해 핏속으로 들어간다. 장세포 사이에 보초를 서고 있던 위장관 내분비세포는 GLP-1 호르몬을 분비하여 신호를 보낸다. “당 들어옵니다”라고.

이 신호를 받은 췌장의 베타세포는 인슐린을 뿜어낸다. 그러면 식후 혈당이 치솟지 못하고 그대로 누그러진다. 장을 통해서 더 많은 당이 계속 들어오면 위장관 내분비세포는 더 많은 GLP-1 호르몬을 뿜어내며, “위장, 음식 천천히 내려보내!”라고 호령을 내린다. 위장은 음식을 십이지장으로 안 보내고 버틴다. 그러면 식후 혈당은 다시 내려간다. GLP-1은 멀리 뇌로도 신호를 보내 “그만 먹자”고 말한다. 순간 포만감이 밀려온다. 가히 GLP-1은 수퍼 호르몬이다.

GLP-1은 이런 방식으로 식후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키고, 위 운동을 감소시키며, 포만감을 증가시키고, 식욕을 억제한다. 혈당이 떨어지고 체중이 빠진다. 혈당이 정상 이하로 내려가면 GLP-1은 작용을 멈춘다. 낄 때와 빠질 때를 정확히 안다. 필자는 최근 이런 이야기를 모아 ‘수퍼 호르몬’(21세기북스 펴냄)이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GLP-1 을 올리는 치료제는 심혈관 질환 발생도 줄였다. 당뇨병에 의해 망가진 콩팥이 만들어내던 단백뇨 거품도 준다. 지방간이 좋아지고, 수면 무호흡증이 개선됐다. 파킨슨병 증세 악화도 막을 것으로 보인다.

약점은 있다. 이 약은 주사로 맞아야 한다. 가격이 비싸다. 속이 매스껍고, 꽉 막힌 듯하다가 심하면 구토까지 발생한다. 다행인 것은 우리 몸은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부작용에 내성이 생긴다. 몇 주만 참고 버티면 대개는 좋아지기 마련이다.

GLP-1 치료제의 혁신은 현재 진행형이다. 매일 맞던 주사를 일주일에 한 번 맞게 됐고,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맞거나, 먹는 약으로도 개발되고 있다. 이제 현대인의 뿌리 깊은 만성 대사질환 비만이 해결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감염병에 대항해 항생제가 탄생했고, 암에 대항에 항암제가 등장하여 인류 역사를 바꿨듯이 비만에 대항해 GLP-1 치료제가 등장해 현대인의 삶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