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언론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관훈클럽 영시공부모임(회장 신연숙)에 들른다. 며칠 전 이 모임에서 읽은 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T.S. 엘리엇의 데뷔작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프루프록이란 독특한 이름의 남자가 마음에 둔 여자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내면의 갈등과 불안을 그린, 단순한 이야기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은 시다.

그런데 그 시가 며칠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속 주인공이 지금 광장의 우리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나 닮지 않았나하는 생각 때문이다.

시는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대도시의 지저분한 뒷골목을 지나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가는 독백으로 시작된다. 겉으로는 고상한 이상과 사랑을 꿈꾸지만 속으로는 사교모임에서 어떻게 여자의 환심을 살까 전전긍긍한다.

광화문광장은 주말이면 보수-진보세력들의 집회로 몸살을 앓는다. 대부분 상대방을 비난하며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한다. /Freepik

마음속 불안은 온갖 하찮은 걱정―탈모, 체격, 세상의 눈초리에 짓눌려, 막상 그녀 앞에서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소심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평론가들은 주인공이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주저하며, 현실과 자기 내면의 벽에 막히는 모습,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무기력하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에서 현대인의 복잡한 의식의 속성과 문제점들을 잘 들춰냈다고 극찬한다.

50년 전 한국과 지금 한국

50년전 내 어린 시절 한국 사회는 엘리엇이 그린 세계와 달랐다. 가난하고 좀 무리(無理)한 사회였지만 한방에서 웃고 싸우고 뒹굴 수 있는 가족과 이웃이 있었고, ‘단순한 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풍요를 얻은 우리는 덜렁 혼자 남아 내면이 이리저리 분열된 ‘복잡한 나’가 있을 뿐이다. 수많은 프루프록들처럼…

겉으로는 21세기적 교양과 옷차림을 갖추고 자유, 민주, 평등, 사랑, 인권, 공동체, 정의, 원칙같은 이상을 외치지만, 속마음은 온갖 쪼잔한 생각, 비루함, 열등감, 박탈감, 분노, 트라우마, 불안, 두려움, 시기, 질투 그리고 무력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T.S. 엘리엇(1888~1965)의 전성기 시절인 35세때(1923년) 어느 일요일 오후 모습. 우리에게 친숙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시 ‘황무지’가 출간되고 1년 뒤다. 194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위키피디아, 국립초상박물관

물질적 풍요를 얻었지만 지금 우리의 내면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해결하지 못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광장에서 이념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악마로 규정하며 우리만 옳다고 외치거나, 시장으로 나가 더 많은 돈과 성공으로 치환하려고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동굴로 숨어 혼자 고독과 싸우며 우울증과 신경증으로 병들어간다.

해답은 자기 내면에 있다

이런 문제는 이념이나 제도, 누군가의 권위가 구원해 주지 못한다. 50년 전 그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갔던 한국인들이 지금 민주화되고 풍요로운 시대에 오히려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증명해 준다. 솔직히 말해 지금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폄하하는 데는 선수지만 정작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우리는 산만하고 쓸데 없는 생각의 반복(rumination)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사진은 파리에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셔터스톡

정신신경증을 치료하는 의사들은 환자가 먼저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수 있도록 마음의 체력을 키우는 데 주력한다.

그런 다음 분열된 자기, 즉 비겁하고 나약하고 우울하면서도, 의연하고 용기 있고 강건한 자신의 두 모습을 모두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끌어안을 수 있도록 돕는다.

자기를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자신,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친절로 이어진다. 광장의 외침이든, 동굴의 침묵이든,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내면과의 화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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