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가재울홈마트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안시영(36)씨가 결식아동에게 무료로 고기를 내주기 시작한 건 지난 2월부터다. 열 살짜리 초등학생 어린이가 두 손에 카드를 꼭 쥐고 안씨 가게 앞을 서성이는 걸 본 게 계기가 됐다. “손에 든 카드가 뭐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이거 가지고 가면 밥 먹을 수 있대요”라고 했다. 지자체에서 결식아동에게 지급하는 ‘꿈나무카드’였다. 이를 몰랐던 안씨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나서 그 카드로 한 끼당 7000원어치 밥을 사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급식 단가가 1만원 미만인 그 카드로는 아이가 정육점에서 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며 “그때부터 그냥 카드를 보여주기만 하면 삼겹살이든, 등심이든 원하는 고기를 내주기 시작했다”고 했다. 최근엔 매주 10명 정도의 결식아동이 찾아온다고 한다. 안씨는 매월 90만원 상당의 고기를 무상으로 내주고 있다.
그도 코로나 여파로 매출이 40%나 빠진 영세 자영업자다. 하지만 그는 “밥 못 먹는 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알아서 그런다”고 했다. “어릴 때 집안 사정이 안 좋아 단칸방에 살았어요. 중학교 때부터 전단 돌려서 700원짜리 컵라면으로 배를 채웠죠. 굶는 날이 많아서 20대 초반까지 몸무게가 35㎏를 안 넘었어요.” 그는 “아이들이 고기 받아 가는 걸 보면 기쁘고 나도 힘을 얻는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로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지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결식아동을 돕겠다고 나선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2019년 7월 출범한 ‘선한 영향력 가게’는 결식아동에게 무료로 식사·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영업자들의 모임이다. 코로나 이전에 시작해 작년 말까지 1년 6개월간 700여 매장이 가입했다. 그런데 올 들어 상황이 더 안 좋아졌는데도 8개월 동안 2000여 곳이 새로 가입해, 지난 1일 기준 전국 매장 회원이 2766곳으로 늘었다. 이 모임을 이끄는 오인태(36) 진짜파스타 대표는 “요즘도 가입 문의가 매주 40여 건씩 들어온다”고 했다.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 거리에도 이 모임에 가입한 가게들이 있다. 2일 현재 이대 정문 앞에서 지하철 이대역까지 200여m 구간의 1층 매장 56곳 중 17곳(30%)이 폐업했거나 영업을 중단한 상태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에도 이 인근에서 선한 영향력 가게 3곳이 늘어 현재 5곳이 결식아동을 돕고 있다. 한식당 ‘밥이꿀바비꿀’을 운영하는 고유리(27)씨는 지난 4월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의 가게도 코로나로 매출이 절반으로 줄었다. 고씨는 “저도 학생 때 꿈나무카드 들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하고 우유를 자주 사 먹었는데, 카드를 내밀 때마다 내가 가난하다고 알리는 것 같아 창피했다”며 “내가 누구보다 그 맘을 잘 아는 만큼 아이들이 당당하게 찾아와서 내게만 카드 살짝 보여주고 맛있게 밥을 먹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식당 ‘수라’를 운영하는 홍정미(49)·홍지연(45)씨 자매도 코로나로 매출이 반 토막 났지만 2년째 결식아동들에게 무료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홍씨 자매의 가게에는 매일 같이 찾아오는 한 부모 가정의 세 남매가 있다. 밥을 먹으려고 집에서 엄마와 함께 버스로 4~5정거장 거리를 타고 온다고 한다. 홍씨는 “아이들이 고기를 좋아해 ‘불고기정식’과 ‘쇠고기된장찌개’를 주로 주는데, 엄마는 아이들 먹는 것만 지켜보고 항상 배부르다며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 이들의 방문이 갑자기 뜸해져 홍씨 자매의 근심도 커졌다. 홍씨는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코로나 때문에 사장님도 어려울 거 같아서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하더라”며 “개의치 말고 꼭 오시라고 했다”고 말했다.
카페 ‘에어플레인모드’를 운영하는 강윤정(32)씨는 입구에 ‘선한 영향력’ 스티커를 붙이고 결식아동이 찾아오면 주스, 커피 등 마실 거리를 내준다. 그는 “나도 홀어머니와 반지하 방에 살면서, 남들처럼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공부할 돈도 없어 꿈조차 가지지 못했다”며 “2019년 7월에 가게 문을 열었는데 몇 달 만에 코로나가 터졌고 현재는 매출이 개업 초기의 5분의 1 수준이지만, 그래도 가게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돼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틴다”고 했다. 처음엔 쭈뼛쭈뼛하던 아이들이 점차 편하게 오는 것이 그에겐 기쁨이라고 한다.
이대 앞에서 ‘데몬헤어’ 미용실을 운영하는 김영숙(59)씨는 코로나가 시작된 작년 초부터 꿈나무카드를 들고 오는 아이들에게 무료로 머리를 잘라주고 있다. 김씨는 “아이들이 한창 꾸미고 싶은 나이인 걸 아니까 아이들 원하는 대로 머리를 잘라 준다”며 “내가 직접 해주기도 하고, 직원이 대신 해준 경우에는 사비(私費)로 돈을 내준다”고 했다. 홍대 앞에서 ‘아이오안경원’을 운영하는 이정우(35)씨는 결식아동에게 무료 시력 검사를 해주고, 10만원 이내로 안경·렌즈를 맞춰준다. 그는 “아이들이 제가 맞춰준 안경으로 더 밝은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반인도 동참을 원하면 모임 홈페이지(선한영향력가게.com)를 통해 후원할 수 있다.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자영업자들도 늘고 있다. 2016년부터 결식아동 후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세이브더칠드런에 따르면, 2019년 말 기준 322곳이던 가입 매장이 코로나 이후 빠르게 늘어 올 8월에는 557곳이 됐다. 서울 마포구에서 분식집 ‘킴스맘’을 운영하는 김지현(46)씨도 매월 10만원씩을 낸다. 그는 “매출이 5분의 1 토막 났지만, 내가 좀 덜 쓰고 우리 애들 셋이 좀 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