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제 오류 논란으로 정답이 유예된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영역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은 정답이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이주영)는 15일 수능 생명과학Ⅱ 응시자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낸 정답 결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생명과학Ⅱ 20번 문항 정답을 5번으로 결정한 처분을 취소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문제에서 제시한 조건을 사용해 동물 집단의 개체 수를 계산할 경우, 특정 유전자형의 개체 수가 음수로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생명 과학의 원리상 동물 집단의 개체 수가 음수일 수는 없으므로, 이 사건 문제엔 명백한 오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 정답을 5번으로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생명 과학 원리를 무시한 채 답을 고르라는 것으로 부당하다”고 밝혔다.
평가원은 이날 법원 판결이 나오자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은 전원 정답 처리한다”며 “대학 입시 일정에 더 이상 혼선이 일지 않도록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2월 취임한 강태중 평가원장은 “이번 일의 책임을 절감하고 물러난다”고 했다. 평가원의 항소 포기로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출제 오류 때처럼 대학이 합격자를 발표한 후 수능 성적을 재산출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이 치른 생명과학Ⅱ의 20번 문항(배점 2점)에 대해 응시생 6515명 전원이 정답 처리됨에 따라 서울대 자연계와 다른 대학 의약학 계열 응시생들 간 유·불리가 갈리는 등 파장이 이어질 전망이다.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은 정답이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평가원은 이 문항을 전원 정답 처리해 재채점한 결과를 이날 오후 6시 내놓았다. 지난 9일 평가원이 정답을 5번으로 채점했을 때와 비교하면 표준점수 최고점 69점이 68점으로 1점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표준점수는 수험생의 원점수가 평균 성적과 얼마나 차이나는지 난도에 따라 보정한 점수로, 평균이 높으면 표준점수 최고점은 낮아진다. 생명과학Ⅱ 모든 문제를 맞힌 수험생의 표준점수 최고점이 기존에는 69점이었다. 하지만 2점짜리 문항이 전원 정답 처리돼 평균이 높아지면서 재채점 후 표준점수 최고점이 낮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생명과학Ⅱ 응시생 최상위권은 정시 모집에서 다른 과학탐구Ⅱ 응시자보다 불리해질 전망이다. 생명과학Ⅱ 응시생 인원은 6515명으로 지구과학Ⅱ(3570명), 화학Ⅱ(3317명), 물리학Ⅱ(3006명) 등 다른 과목의 2배에 이른다.
또, 표준점수가 바뀌면서 생명과학Ⅱ 1등급 인원은 당초 309명이었는데 재채점 이후 269명으로 40명이 줄었다. 2등급 인원은 587명에서 508명으로 79명 감소했다. 생명과학Ⅱ에 응시한 수험생 다수는 서울대 자연계열, 다른 대학 의대 등을 지원하는 최상위권 학생이어서 등급 변동으로 수능 최저기준을 맞추지 못해 탈락하는 경우도 생길 전망이다. 다만, 이처럼 유⋅불리가 갈리는 것에 대해 평가원은 “정답 유예로 생명과학Ⅱ 성적은 통보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전에 발표한 정답을 기준으로 유⋅불리를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이번 수능 전체 응시생(44만8138명) 가운데 생명과학Ⅱ를 치른 수험생은 6515명(1.5%)이지만 이들의 표준점수가 변동됨에 따라 자연계열 상위권 학생의 입시 결과에 끼치는 영향은 클 것으로 보인다. 이과 최상위권인 생명과학Ⅱ 응시자의 당락이 다른 학생들에게 미치는 연쇄 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입시 현장에서는 재채점으로 표준점수 등이 바뀌면서 수시·정시모집 모두 영향을 받게 된 상황에서 여파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사상 첫 문·이과 통합 수능으로 치러진 가운데 수학 만점자가 2702명으로 작년보다 크게 늘어 과학탐구 영역의 변별력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출제 오류에 따른 재채점으로 수시에서 수능 최저학력 기준에 미달하는 학생이 생길 수 있고, 정시에서는 서울대와 의약학 계열 커트라인이 다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교육계에서는 이번까지 총 7차례 수능에서 9개 문항의 출제 오류가 발생한 가운데 5개 문항이 과학탐구영역인 점을 들어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과학탐구영역은 출제 오류 논란이 생기면 평가원이 다양한 전문가들에게 논의를 개방하는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1심 재판부도 “만일 이 사건 문제의 정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수험생들은 앞으로 수능 과학탐구영역에서 과학 원리에 어긋나는 오류를 발견하더라도 그러한 오류가 출제자의 실수인지 의도된 것인지 불필요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며 “또한 수능을 준비하면서 사고력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고 출제자가 의도한 특정 풀이 방법을 찾는 것에만 초점을 두게 될 우려도 있다”고 밝혔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출제 오류 논란이 일었을 때 평가원이 일부 학회에만 자문하는 폐쇄적인 대응 체계를 고집하며 안이하게 대처해 혼란을 키웠다”며 “이번 출제 오류가 수능 체계의 근본적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