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1심 재판에서 직권남용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 10여년 전 직권남용죄에 관한 논문에서 ‘직권남용죄를 확장해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견해를 제시한 것으로 29일 확인됐다.
이 전 실장에 대한 이번 1심 판결은 기존 판례보다 직권남용죄의 범위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 ‘확장 해석’으로 유죄를 받게 된 이 전 실장이 십수년 전 이에 비판적인 학술 논문을 이미 발표했던 것이다. 그 뒤 다름아닌 이 전 실장 본인이 이 혐의로 법정에 서고, 자신이 부당하다고 본 논리로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을 두고 ‘아이러니’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전 실장이 쓴 논문은 2005년 법학 학술지 ‘형사판례연구’에 게재된 ‘직권남용죄에 있어서 주체와 직권남용의 의미’다. 당시 이 전 실장은 대법원 재판연구관 신분이었다. 이 논문은 당시 직권남용죄를 적용한 대법원 판례를 평석하는 내용이다.
이 전 실장은 논문에서 대법원이 ‘직권’ 개념을 부당하게 확장했다며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의문이 있다”고 비판했다. 해당 대법원 판례는 지난 1997년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개인적 친분이 있는 특정 기업에게 대출을 실행해주라고 은행에 요구한 사건으로, 당시 대법원은 이것을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보고 유죄로 판단했다.
이 전 실장은 논문에서 “재정경제원 장관에게 특정 기업에 대해 대출을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출 지시가) 비록 관행적으로 이뤄져왔으나, 이는 사실상의 영향력에 기인한 것으로, 그렇다고 이로써 대출 지시 권한을 (장관의)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했다. 애초에 직권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직권을 전제로 한 직권남용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전 실장은 논문에서 “만약 장관의 일반적 직무권한 속에 개별 기업에 대출을 할 것을 지시하는 권한이 포함된다면, 이는 시중은행의 경영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본 판결은 우리 사회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처벌을 필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직권남용죄에 있어서 ‘직무 권한’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해석한 것”이라고 했다.
이 전 실장은 지난 23일 국회의원 관련 사건의 재판부 동향을 파악한 혐의와 법원 수뇌부에 비판적인 법관 모임을 와해하려 시도한 혐의 등 직권남용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기소된 14명의 법관 중 첫 유죄 판단이었다.
서울중앙지법 윤종섭 부장판사가 재판장을 맡은 이 전 실장 사건 재판부는 법원행정처의 직권에 ‘일선 재판부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권한’까지 포함된다고 봤다. 이를 기초로 이 전 실장이 그 권한을 남용해 직권남용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법원 안팎에서는 “유죄 결론을 내기 위해 직권 개념을 무리하게 확대했다”는 비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