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가 손주를 자녀로 입양할 수 있다는 첫 대법원 판단이 23일 나왔다. 입양이 손주의 행복과 이익에 기여한다면 자녀로 입양할 수 있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이날 A씨 등이 ‘입양 허가를 받아들이지 않은 법원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에서 재판관 10대3 의견으로 A씨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A씨가 패소했던 2심 판결을 뒤집고 사건을 울산가정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 부부는 딸이 고등학생 때 출산한 손자 B군을 맡아 기르고 있다. 딸은 출산 후 남편과 이혼했고, B군이 7개월이 될 무렵 A씨 부부에게 맡겼다. B군은 외조부모인 A씨 부부를 친부모로 알았고 호칭도 엄마·아빠로 불렀다. 그런 가운데 A씨 부부는 부모 없이 학창시절을 보내면 불이익이 클 것을 고려해 외손자의 입양을 청구했다. 기존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친양자 입양’ 대신 관계가 유지되는 일반 입양을 청구했다. 이 경우, B군을 낳은 친어머니는 법적으로 B군의 누나가 되면서 생모(生母)의 지위도 유지한다. 이혼 상태에 있는 B군 생모와 생부도 입양에 동의했다고 한다.
1심과 2심은 “조부모가 부모가 되고 어머니가 누나가 되는 등 가족 내부 질서와 친족 관계에 혼란을 가져온다”며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민법 867조는 미성년자의 복리를 위해 양육 상황과 입양 동기 등을 고려해 입양 허가를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조부모가 손자·손녀의 입양을 청구하는 경우에도 입양의 요건을 갖추고 자녀의 행복과 이익에 부합한다면 입양을 허가할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민법상 손윗사람(존속)이 아니라면 피붙이(혈족)의 입양도 가능하며, 조부모와 손자가 부모·자녀 관계를 맺는 것이 입양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다”고 밝혔다. 또 “구체적인 심리 없이 전통적 가족 공동체의 관점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 관계를 변경시키는 것이 혼란을 초래하거나 자녀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막연히 추단해 입양을 불허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입양이 B군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다시 따져보라”고 했다.
반면 소수 의견을 낸 조재연·민유숙·이동원 대법관은 “향후 자녀의 정체성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며 “친부모가 살아 있는 경우 조부모 입양에 대한 허가는 엄격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2011년 대법원은 조부모가 외손녀를 ‘친양자’로 입양하려는 사건에서는 “가족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며 불허했다. 친양자는 기존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입양 형태다.
여성계에서는 이번 판결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박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부장은 “가정법률과 관련한 문제에서 아이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는 게 세계적 추세인데, 이런 방향에 맞는다”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조부모와 손자·손녀로 구성된 조손 가정은 전국에 11만7705가구가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조손 가정에 부모·자녀 관계를 형성하는 길을 열어 줬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일선 판사들 사이에서는 “가족 관계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자녀가 사고 쳐서 낳은 손주를 입양으로 가리는 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한 부장판사는 “손주 행복을 위하는 방법이 조부모 입양밖에 없는지 의문”이라며 “조부모가 후견인이 돼 부모처럼 돌보는 ‘미성년 후견’ 제도도 있는데 왜 굳이 기존의 가족 질서를 무너뜨리는 ‘손주 입양’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