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서해에서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해수부 공무원 이대준씨에 대해 해경이 청와대 지침에 따라 ‘자진 월북’이라고 발표하기에 앞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A 행정관이 해경 수사정보국장을 찾아와 “청와대 지시를 무시하고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는 증언이 23일 나왔다. 문재인 청와대가 해경에 “월북에 방점을 두고 수사하라”는 지침만 내린 게 아니라 수사 책임자를 직접 압박했다는 내용이다. A 행정관은 더불어민주당 친문 의원 보좌관 출신으로 해경을 관할하며 해경 간부들 사이에서 ‘해경 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청와대 전경. 2022.4.27/뉴스1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A 행정관은 서해 공무원 피격 사망 사건 당시 김홍희 해경청장에게 “자진 월북에 방점을 두고 수사하라”는 지침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 발생 이틀 뒤 해경이 “자진 월북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첫 수사 발표를 한 직후였다고 한다. 김 청장이 일부 참모와 회의를 열었지만 청와대 지침을 따를지 여부를 결정하지 않자 A 행정관이 직접 윤성현 수사정보국장을 찾아왔다고 당시 해경 관계자들이 전했다.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한 인사는 “A 행정관이 윤 국장에게 ‘청와대 지침을 무시하고도 감당할 수 있겠나’라는 취지의 언급을 하며 강하게 압박했다”고 말했다. 마치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사건’에서 산업부 장관이 ‘원전 가동 연장’을 보고한 부하 공무원에게 “너 죽을래”라고 했다는 것과 닮은꼴이다.

해경은 서해 공무원 사건 첫 수사 발표에서 “자진 월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가, 불과 닷새 만에 윤 국장이 직접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자진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단정적 결론을 내놨다. A 행정관이 윤 국장을 직접 만난 뒤 발표 내용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후에도 A 행정관은 윤 국장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수사 내용을 논의했다고 한다. 해경 전직 간부는 “윤 국장이 차를 타고 가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A 행정관이 고함을 치며 부하 직원 다루듯 수사 내용을 물어봤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해경 수사 라인은 ‘자진 월북’ 발표를 한 뒤 줄줄이 승진했다. 윤 국장은 사건 3개월 뒤 치안감 승진과 함께 해경 내 주요 보직인 남해지방해양경찰청장이 됐다. 당시 윤 국장은 계급 정년에 걸려 1년 안에 승진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해경 관계자는 “윤 국장은 경무관 시절 감사원 감사에서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뜻밖에 승진했다”면서 “윤 국장 입장에선 A 행정관의 압박이 달콤한 제안이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시 윤 국장 휘하에서 이 사건 수사 실무를 담당했던 과장급 3명도 승진하거나 좋은 보직으로 옮겼다.

최근 해경은 ‘자진 월북’ 결론을 철회했다. 해경은 지난 16일 “1년 9개월에 걸쳐 수사를 진행했지만 월북 의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정봉훈 현 해경청장도 지난 22일 “피격 공무원 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 국민과 유족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 최창민)는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종호 전 민정수석과 이광철 전 민정비서관을 ‘자진 월북 지침’ 의혹으로 수사하고 있다.

본지는 A 전 행정관과 윤 전 국장에게 수차례 연락했지만 답이 없었다. 김 전 청장은 “수사에 대한 구체적 지시를 한 적 없다”고 했다. 나머지 해경 간부들은 ‘수사에 관여한 적 없다’거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