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금융 당국이 가상화폐나 국내 거래소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조사에 착수했지만 혐의 적용, 위법성 판단 등 조사 진척이 더딘 것으로 25일 전해졌다. 정부의 규제 방침이나 가이드라인이 분명치 않으며, 사실상 가상화폐에 대한 수사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법조계에선 “문재인 정부에서 방치된 당국의 가상화폐 관련 수사 의지가 현 정부에 어떻게 바뀔 지 주목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달 29일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지원센터 모니터에 비트코인과 알트코인의 시세가 보이고 있다. /뉴시스

가상화폐 거래소를 통해서 거래되는 가상화폐는 세계적으로 1만 종이 훌쩍 넘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가상화폐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ICO(Initial Coin Offering·가상화폐 공개)를 통해 시장으로 유통된다. 그나마 2021년 3월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이 시행되면서 그해 10월부터 실명 계좌를 발급해준 은행이 가상화폐 거래소의 상장 기준과 심사 과정 등을 확인하도록 했다. 하지만 금융 당국의 규제를 받기 시작한 2021년 10월 이전에 상장한 코인들의 투자 리스크가 여전히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권도형 테라폼랩스 최고경영자(CEO)./뉴스1

가상화폐 투자자들에게 50조원 넘는 피해를 준 ‘루나 사태’가 대표적이다. 루나 사태는 작년 5월 권도형 대표의 테라폼랩스가 발행한 가상화폐 테라와 루나의 가격이 99% 이상 폭락한 사건이다. 당시 루나와 테라가 상호 보완적으로 가격을 유지하도록 설계돼 있던 체계가 갑자기 깨지면서 피해액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권도형씨는 테라와 루나의 가격이 동반 폭락할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투자자들에게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해외에서 머무르고 있다. 사실상 검찰 수사가 ‘개점 휴업’ 상태라는 것이다.

권씨는 루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작년 4월 싱가포르로 출국했고, 그 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등을 경유해 현재 동유럽 국가인 세르비아에 들어간 것으로 수사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검찰은 권씨가 수사를 피하기 위해 해외 도피 중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권씨는 트위터,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나는 도주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빗썸고객센터./뉴스1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신규 코인 상장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깜깜이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 피해가 투자자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수사당국은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 관련 자금 최소 1200억원대 안팎이 해외로 유출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빗썸을 운영하는 회사인 빗썸코리아는 2019년 전후 싱가포르에 설립된 빗썸글로벌홀딩스의 최대주주인 BK컨소시엄(BTHMB)에 신규 가상화폐 상장 대행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BTHMB 대표를 지낸 중국 국적의 A씨가 가상화폐 개발 업체 40여 곳으로부터 상장 비용, 마케팅 비용 등 수수료 명목으로 한 곳당 30억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의혹과 관련해 이재원 현 빗썸코리아 대표 등도 수사 선상에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서울남부지검 금융조사1부(부장 이승형 부장)는 지난 1월 말 서울 강남구에 있는 빗썸을 압수 수색해 빗썸에서 거래된 가상화폐의 거래 내역 등을 확보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인 지난 1월 중순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빗썸을 운영하는 빗썸코리아, 빗썸홀딩스 등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당국은 빗썸 관련자들에게 ‘특경가법상 재산 국외 도피’ 혐의 적용을 검토 중이다. 국내로 들여와야 할 자산을 법령을 위반해 국외로 은닉 또는 처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중국 국적의 A씨가 받은 가상화폐 관련 수수료는 재산 국외 도피 혐의의 구성 요건인 ‘국내 반입 의무가 있는 재산’이 아니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어 수사당국은 혐의 적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빗썸 실소유 의혹을 받고 있는 강종현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1일 서울남부지법에 들어서고 있다./뉴스1

또 서울남부지검 금융조사2부(부장 채희만)는 빗썸 관계사 경영진의 횡령 혐의를 포착해 수사 중이기도 하다. 검찰은 작년 10월 빗썸 관계자인 인바이오젠, 비덴트, 버킷스튜디오 등을 압수 수색해 회계 관련 자료 등을 확보했다. 비덴트는 빗썸홀딩스의 지분 34.22%를 보유한 단일 최대 주주이며, 인바이오젠과 버킷스튜디오의 대표를 지낸 강지연씨는 빗썸홀딩스의 사내이사를 맡은 바 있다. 강지연씨는 지난 2020년 230억원으로 비덴트, 인바이오젠, 버킷스튜디오 등 3개사를 사들였는데, 이 인수 대금이 강씨의 오빠인 강종현씨가 횡령한 금액 중 일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돼 있다. 강종현씨는 최근 배우 박민영씨와 열애설이 불거졌던 인물이다.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 건물 앞에서 위믹스 투자자들이 위믹스 상장 폐지 이유 공개와 투자자 피해보상 촉구 집회를 하고 있다./뉴스1

국내 게임사 위메이드가 발행한 가상화폐 ‘위믹스’는 작년 12월 법원에서 상장폐지가 확정되기도 했다. 국내 4개 주요 가상화폐 거래소는 작년 11월 “유통 물량을 제대로 공시하지 않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다”며 위믹스 상장폐지를 결정했는데, 위메이드가 이에 반발해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으나 기각당한 것이다.

이에 따라 4개 거래소의 국내시장 점유율 98%가 넘었던 위믹스는 작년 12월 8일부터 4개 거래소에서 사고팔 수 없게 됐고, 위믹스 가격은 폭락했다. 상장폐지에 따른 개인 투자자들의 손실이 수천억원에 달하게 된 것이다.

가상화폐 업계에선 “정부의 전향적인 대책 없이는 비대칭한 정보를 가지고서 가상화폐 시장에 뛰어드는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제2, 제3의 피해가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첫 대형 가상화폐 범죄였던 루나 사태의 권도형씨가 해외로 도피해 여전히 사법 처리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다 검찰이나 국세청 등이 가상화폐 관련 범죄에 대한 엄단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이대로라면 개인 투자자들은 계속 피해를 입고 국내 자산은 해외로 반출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