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제주 ‘ㅎㄱㅎ’ 사건 피고인들에게 직권 보석, 전자 팔찌 면제, 주거지 제한 해제 등 ‘3단계 혜택’을 준 것으로 22일 전해졌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ㅎㄱㅎ’ 사건의 1심 재판을 맡은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진재경)는 구속된 피고인 고모(53)씨와 박모(48)씨에게 지난 9월 19일 직권 보석(保釋) 결정을 내렸다. 전자 팔찌 착용과 주거지 제한,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는 동안 증거 인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제출 등을 조건으로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구속 기간 만료를 2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일주일 뒤 고씨와 박씨에게 전자 팔찌 착용을 면제해 줬다. 앞서 박씨는 보석 결정 다음 날인 9월 20일 ‘보석 조건 중 전자 팔찌 부착을 원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석방을 거부했다고 한다. 고씨도 전자 팔찌 부착 과정에 반발했다가 보석 조건 위반으로 제재를 받았다고 한다. 또 ‘공안 탄압 저지 및 민주 수호 제주 대책위’라는 단체는 9월 21일 제주지법 정문 앞에서 ‘재판부 규탄’ 기자회견도 개최했다. 당시 이 단체는 “성범죄자에게나 채우는 전자 팔찌를 부착시키는 게 무슨 석방인가”라며 “모욕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반인권적인 전자 팔찌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재판부는 고씨와 박씨에게 ‘보석 보증금 3000만원’을 내는 조건으로 전자 팔찌 착용을 면제한 것이다. 고씨와 박씨는 9월 26일 보석 보증보험 증서만 제출하고 전자 팔찌를 착용하지 않은 채 풀려난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지난 14일에는 피고인 박씨에 대한 주거지 제한도 해제됐다. 박씨가 지난 9일 ‘국내에서 신혼여행을 다녀오겠으니 주거지 제한 조치를 일시 해제해 달라’는 취지의 여행 허가 신청서를 냈더니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박씨는 결혼식에서 찍은 사진을 지난 20일 페이스북에 올렸다. 여기에 ‘이럴 여유도 있군요’ ‘축하드립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한 법조인은 “국보법 위반 사범도 구속 기간 만료를 앞두고 보석으로 풀어줄 수 있지만 이후 제약 조건을 차례로 없애주면서 공범 등과 접촉할 기회를 준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백형선

제주 ‘ㅎㄱㅎ’은 총책 강모(53)씨가 2017년 7월 캄보디아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해 지령을 받아 국내로 돌아온 뒤 결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강씨는 “제주 지역에서 노동·농민 부문 역할을 강화하고 대중 투쟁을 전개하라”는 북한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2022년 9월 고씨, 박씨 등과 함께 ‘ㅎㄱㅎ’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ㅎㄱㅎ’은 ‘한길회’의 초성으로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조국 통일의 한 길을 가겠다’는 뜻이라고 공안 당국은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ㅎㄱㅎ’에서 농민 부문은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인 고씨가, 노동 부문은 진보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박씨가 맡았다는 게 지금까지 검찰 수사 결과다. 또 여성 농민·청년·학생 부문은 총책인 강씨가 담당했다고 한다. ‘ㅎㄱㅎ’ 조직원은 10여 명으로 파악됐다.

제주지검은 지난 4월 5일 고씨와 박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다만 강씨는 암 투병 중이라는 이유로 불구속 기소됐다. 피고인들은 수사 단계부터 ‘지연 전술’을 구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 이후 한 차례도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연 전술은 재판 단계에서도 계속됐다. 피고인들은 지난 4월 24일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나오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이 신청에 대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본(本) 재판은 진행될 수 없다. 제주지법 형사2부가 국민참여재판을 하지 않는다고 결정하는 데 57일이 걸렸다. 그러자 피고인들이 항고, 재항고를 냈다. 2심인 광주고법 제주재판부가 국민참여재판 신청을 기각하는 데 또 68일이 걸렸다. 이어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가 다시 62일간 심리한 뒤 지난 20일 최종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지난 4월 기소된 이후 8개월간 유무죄를 가리는 정식 공판이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다음 재판 날짜도 아직 잡히지 않았다.

한편 제주지법 형사2부 재판장인 진재경(사법연수원 36기) 부장판사는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회원으로 전해졌다. 진 판사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절 서울서부지법, 서울중앙지법에서 재직하다가 작년 2월 제주지법에 발령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