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성창호 전 부장판사, 유해용 전 수석재판연구관, 홍승면 전 고법부장,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성근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연합뉴스·뉴시스·조선일보 DB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 연루돼 ‘적폐 판사’로 낙인찍혀 퇴직한 고위 법관들이 변호사로 주목받고 있다. 법조계에선 “실력은 물론, 법관들 중에는 최고 수준이었던 법관들이라 변호사로서 주목받는 것은 당연한 현상 아니겠느냐”는 반응이 나왔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 14명 중 12명이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이들은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법원행정처 요직 등 법원 내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실력자들이 대부분이다. 법원에 있을 때는 ‘대법관 0순위’ ‘차기 대법원장’ 등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화려한 경력만큼 대형 기업 사건이 이들에게 몰리고 있다고 한다.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성창호 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법무법인 광장)는 증여세를 회피하려고 계열사 주식을 저가에 양도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허영인 SPC그룹 회장 변호인을 맡아 2심까지 무죄를 받아냈다. 성 전 부장판사는 차기 광장 대표변호사로도 거론된다. 또 무죄가 확정된 유해용 전 수석재판연구관(김앤장 법률사무소)은 ‘영풍·MBK-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 고려아연 측 대리인, ‘순위 조작’ 쿠팡-공정위 소송에서 쿠팡 측 대리인 등을 맡고 있다. ‘세기의 이혼 소송’이라고 불리는 최태원·노소영 항소심에서 최 회장 측 변론을 맡았으나 고배를 마셨다.

이 사건 상고심의 최 회장 측 대리인은 올해 퇴직한 홍승면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맡았다. 홍 전 부장판사는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기소된 건 아니지만, 당시 징계가 청구돼 최종 무혐의를 받았다. 홍 전 부장판사가 선임될 때 법조계에선 “2심서 완패한 SK가 홍승면을 데려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홍 전 부장이 상고이유서를 잘 썼다”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홍 전 부장은 또 ‘하이브-민희진 소송’에서 하이브 측을 방어하고 있고, 영풍·MBK-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선 영풍 측 대리인을 맡고 있다. 지난 18일 열린 영풍-고려아연 관련 가처분 신청 사건엔 직접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이끌었다.

2심에서 벌금 1500만원을 선고받은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은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로 금호석유화학 경영권 분쟁 등 도산·기업회생 관련 사건을 다수 맡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 1월 1심에서 전부 무죄를 선고받은 뒤 변호사(법무법인 클라스한결)로 등록해 최근 대법원에 계류 중인 중견기업의 형사 사건을 수임했다.

무죄가 확정된 임성근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법무법인 해광)는 LG그룹 오너가 상속 분쟁 사건에서 구광모 회장의 모친과 여동생 측을 대리하고 있다. 임 전 부장판사는 또 KBS 이사 선임 효력 정지 가처분 및 본안소송의 정부 측 변론을 맡고 있고, ‘핼러윈 참사 부실 대응’ 혐의로 기소된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1심 재판을 담당했다. 임 전 부장판사는 “법원에 있을 땐 법관의 길이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나와서 보니 법률을 적용해 당사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변호사의 역할도 막중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엔 변함이 없다”고 했다.

이른바 적폐 판사들의 부활을 바라보는 법조계의 시선은 안타깝다는 반응이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법원 내에서도 큰 역할을 하셨을 분들인데 참 안타깝다”면서 “밖에서라도 많은 역할을 하고 계시다니 다행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