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 전 서울고등법원장은 사법부 신뢰가 무너진 이유로 정치 편향적 법관 인사를 지목했다. 그는 서부지법 사태에 대해 법원 스스로도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이 확고하였더라면 감히 그런 일이 있었을까.”

지난 7일 퇴임한 윤준 전 서울고등법원장의 퇴임사가 법원 안팎에서 회자되고 있다. 지난달 19일 서울서부지법 난입 사태와 관련해 판사 대부분이 ‘엄벌’과 ‘재발 방지’만 외치고 있을 때 법원의 자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윤 전 고법원장은 사법부 신뢰가 무너진 까닭으로, 정치 편향적 법관 인사를 지목했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도 ‘사법부 불신’에서 초래된 측면이 있다고 했다. 35년 법관 생활을 마친 그를 만나 지금 우리 사회의 ‘사법부 위기’에 대해 들어봤다.

-퇴임사가 화제다. 왜 법원이 국민에게 신뢰받지 못한다고 보나.

“특정한 사건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랜 시간 지속된 현상이다. 판결이 나왔을 때 그것이 판사 성향에 좌우된다는 인식이 팽배할 때부터 신뢰가 많이 약해졌다.”

-판결이 왜 판사 성향에 좌우된다는 인식이 생겼을까.

“대법원장·대법관·헌법재판관 임명권이 있는 대통령이 좌든 우든 치우친 성향의 인사들을 가리지 않고 주요 직책에 앉혔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법원 판결을 ‘판사들이 편향된 결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개헌을 한다면 대통령의 임명권 부분을 수정하고, 미국처럼 판사를 종신직으로 하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법관 13명도 대법원장의 임명 제청을 거치지만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법재판관 9명도 추천은 대통령·대법원장·국회가 3명씩 하지만 임명권은 모두 대통령에게 있다.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 등 특정 모임 판사들의 정치적 편향성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논란거리가 된 판사들은 우리법·인권법 안에서도 극히 일부다. 일반화할 수는 없다. 특히 그 모임 소속이라고 해서 어떤 판결을 했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것 아닌가.”

1월 19일 새벽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되자 일부 지지자들이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을 시도하며 경찰과 충돌하고 있다./연합뉴스

-퇴임사에서 ‘서부지법 사태’를 사법부 신뢰 문제로 본 이유는 무엇인가.

“1990년 법관이 된 이후 판사를 찾겠다며 판사실에 들어가 짓밟는 일은 처음이었다. 엄벌이 필요하다. 하지만 법원이 이런 사태를 조장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 판결을 말하는 게 아니라, 20년 이상 서서히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방치한 탓이 크다. 일부 국민은 폭도가 법원에 쳐들어갈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법원 스스로 돌아봐야 할 문제다.”

윤 전 고법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또한 ‘사법부 불신’의 산물인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는 “계엄의 본질 중 하나가 사법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스스로 법원, 선관위를 믿지 않고 계엄을 한 것 아니냐”라며 “이는 사법 신뢰를 더욱 악화시키는 처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원에 있던 사람으로서 참 비감(悲感)하다“고 했다. ”아무리 전임 대법원장 시절 문제 되는 판결이 있었다고 해도 법원 스스로 제자리를 찾게 해 줘야지, 계엄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는 하면 안 됐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달 19일 서울서부지법이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하자,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법원 내부로 들어가 사무실을 파손한 모습.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법원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입시 비리 사건 판결을 5년 만에 확정했고,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은 5년이 넘어서야 항소심을 겨우 끝냈다. ‘재판 지연’ 논란의 대표적 사례다. 권순일 전 대법관은 2018년 선거법 사건으로 이재명 대표 측과 ‘재판 거래’를 한 의혹을 받아 검찰 수사도 받고 있다.

-최근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비롯해 법관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일이 문제가 되고 있다.

“법관 윤리 강령에 위배된 행동으로 법관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법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받게 한다면 엄중하게 징계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 심판이 유독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쪽에선 공정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어느 진영이든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법관 개인의 편향성 때문이라고 재단하지 말았으면 한다.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판결은 존중해야 한다. 법원을 안 믿으면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겠나. 역으로 법원을 보호하고 사랑해 줘야 법관들이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판결을 할 수 있다. 이건 법원이 아니라 국민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윤준 전 서울고법원장이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과거 법원은 국민에게 신뢰받았나.

“선친께서 대법원장으로 재직하실 때와 비교해 보면, 그때는 법원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아버지께서 대법관 재직 시절 중앙선관위원장도 하셨는데, 선거 관리도 엄정하게 해서 인기도 많으셨다. 그러니까 호남 출신으로 대법원장도 하고, 여러 가지 사법 개혁도 하신 것이다.”

윤 전 고법원장은 고(故) 윤관 전 대법원장의 장남이다. 윤 전 대법원장은 1993~1999년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며 판사가 피의자를 대면 심사하는 구속영장 실질 심사제를 도입했다. 대법원장실에 걸려 있던 대통령 사진을 내렸고,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갈 때 대법원장이 환송 나가는 관행도 없앴다. 1989~1993년 제9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24시간 법원 일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으셨다. 딱히 뭐라고 가르치진 않으셨지만 옆에서 밥만 먹어도 주눅이 들어서 ‘도저히 저분처럼은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해외 연수를 갔는데 ‘공부도 안 하는 애가 뭐 하러 1년이나 해외에 있나. 빨리 귀국해라’고 해서 10개월 만에 돌아왔다. 오히려 불이익을 받았지(웃음). 퇴임 전 짐을 옮기면 직원들에게 누를 끼친다고 퇴임 당일 이삿짐 센터를 불러 짐을 옮기는 분이었다.”

-주변의 기대가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35년 법관 생활을 마친 소감은.

“우리 집안에서 아버지 36년, 저 35년 법관 생활을 했다. 힘들고 외로운 직업인데 무탈하게 끝나서 다행이다. 혹시라도 법리 해석을 잘못했거나 판단이 부족했을 수 있는 사건들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 부분이 있다면 당사자들에게 사과드리고 싶다.”

윤준 前 서울고법원장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해 1990년 판사로 임관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수원지법원장 등을 지냈다. 2011~2013년 대법원장 비서실장으로 진보 성향의 이용훈 대법원장, 보수 성향의 양승태 대법원장을 모두 보필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현 정부 출범 후인 2023년 대법관 최종 후보로 올랐으며, 법원 내에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 인물로 평가받았다. 고(故) 윤관 전 대법원장의 장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