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작성한 정치인 ‘체포 명단’ 메모의 신빙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홍 전 차장이 메모를 작성한 경위와 방식, 대통령에게 체포 지시를 받았는지 여부 등에 대해 엇갈리는 증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홍 전 차장이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 당일 작성했다는 이 메모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 등이 체포 대상으로 적혀 있다. 계엄 해제 후 이 내용이 알려지면서, 국회는 적극적으로 윤 대통령 탄핵소추에 나섰다. 홍 전 차장의 직속 상관이던 조태용 국정원장은 13일 헌재에 나와 “홍 전 차장의 공작에 나라가 흔들렸다고 생각하느냐”는 윤 대통령 측 질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맞다”고 했다. 그러면서 “홍 전 차장이 작성한 메모에 대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홍 전 차장의) 메모와 증언의 신뢰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진다”고도 했다.
◇네 번 쓴 메모... 조태용 “거짓이라 생각”
문제의 메모는 계엄 당일 오후 11시 6분 홍 전 차장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과의 통화에서 비롯됐다. 여 전 사령관이 “체포조가 나갔는데 소재 파악이 안 된다”며 10여 명의 명단을 불러줬다는 것이다. 홍 전 차장은 지난 4일 탄핵심판에서 “국정원장 공관 입구 공터에 서서 포켓 속에 있던 메모지에 받아적었다”며 “어두운 곳에서 전화를 받으며 빠르게 적었고, 사무실에 와서 보니 나도 알아보기 어려워 보좌관을 불러 정서(正書)하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보좌관이 정서한 메모에 자신이 ‘검거 요청’ ‘감금 조사’ ‘방첩사’ 등을 가필한 것이 현재 증거로 남아 있는 메모다. 처음 흘려 적었다는 메모는 구겨서 버렸다고 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박선원 의원은 작년 12월 12일 유튜브에서 이 메모와 관련해 “홍 전 차장이 여 전 사령관과 통화할 때 목소리를 크게 하니까 현장에서 보좌관이 받아 적은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조 원장은 “최근 해당 보좌관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니 사실관계가 달랐다”고 주장했다. 조 원장은 “3일 밤에 홍 전 차장이 사각 포스트잇에 쓴 메모를 줘서 보좌관이 정서를 한 건 맞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오후에 홍 전 차장이 다시 보좌관에게 ‘네가 기억나는 대로 해서 다시 한번 써서 달라’고 했고, 보좌관은 기억을 더듬어 메모를 썼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보좌관은 사람 이름, 직책만 쭉 썼고, 동그라미를 친다든지 방첩사 등은 메모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 여기에 가필한 게 지금 (최종) 메모”라고 했다.
홍 전 차장이 처음 쓴 포스트잇 메모(1차), 보좌관이 당일 정서한 메모(2차), 보좌관이 다음 날 기억에 따라 다시 쓴 메모(3차), 누군가 가필한 최종 메모(4차) 네 가지 버전이 있다는 것이다. 메모를 작성할 때 보좌관이 곁에 있었다는 박 의원 주장과도 달랐고, 1·2차 메모도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조 원장은 말했다.
◇“공관 앞에 있었다는 홍, 사무실에 있었다”
메모를 썼다는 장소도 달랐다. 조 원장은 “홍 전 차장은 공관 앞 공터에서 메모했다고 하는데, (메모 작성 시점인) 11시 6분에는 (국정원) 청사 내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CCTV로 확인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홍 전 차장이 (메모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그 내용의 뼈대가 사실과 다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원장 말이 맞다면 홍 전 차장은 헌재에서 위증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해 홍 전 차장은 “공관과 사무실이 가깝다. 특정 시간이 아니라 전체 동선을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홍 전 차장에게 체포 명단을 불러줬다는 여 전 사령관은 메모 내용을 부인하는 입장이다. 여 전 사령관은 지난 4일 “홍 전 차장이 ‘체포조가 나가 있다’고 말했다는데, 저희 부대가 출동한 건 새벽 1시”라며 “그런 대화를 하진 않았을 거 같다”고 증언했다. 다만 구체적인 명단 등에 대해선 “형사재판에서 홍 전 차장과 따질 부분이 많다”며 말을 아꼈다. 여 전 사령관 변호인단도 “홍 전 차장에게 ‘체포’라는 말을 사용한 기억이 없고 위치 확인 정도만 부탁했었다”고 했다.
◇“홍, 민주당 의원에게 7차례 인사 청탁도”
조 원장은 이날 계엄 직후 윤 대통령에게 홍 전 차장을 해임 건의한 이유도 설명했다. 그는 “홍 전 차장이 계엄 다음 날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전화 한번 하시죠’라고 권했다”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국정원장이 야당 대표에게 연락한다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어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고 했다.
또 “작년 여름 국정원 출신의 야당 의원 중 한 분이 홍 전 차장을 지목하며 ‘내게 7차례 인사 청탁을 하지 않았느냐’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윤 대통령 측이 “박지원 혹은 박선원 의원 중 한명이냐”고 묻자 “네”라고 답했다.
조 원장은 이 같은 정치적 중립 문제 때문에 홍 전 차장을 해임 건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이날 “정치적 중립 문제가 심각하다는 문제가 있어서 해임을 재가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