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기까지 79년이 걸렸다. 3년 교육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올해 ‘중졸’이 된 김옥순(93) 할머니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이야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다.
18세에 결혼해 다섯 자녀와 손주를 돌보느라 공부를 못 했던 김 할머니는 2022년 문해 교육 기관인 서울 영등포에 있는 ‘늘푸름학교’ 문을 두드렸다. 문해 교육 기관은 배움의 때를 놓친 이들이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검정고시를 보지 않고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력 인증을 받을 수 있는 성인 교육 기관이다. 김 할머니는 올해 서울 67곳의 문해 교육 기관 졸업생 570명 중 최고령이다.
늘푸름학교는 대상이 만학도인 점을 감안해 학업 성취도를 따지기보다 정해진 교육과정(초등 1~3년, 중학교 3년)의 30% 이상 출석하면 졸업장을 준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를 오갔다고 한다. 학교 관계자는 “정말 부득이할 때 며칠만 빠졌고 사실상 개근을 하셨다”면서 “그 연세에도 이해가 빠른 ‘모범생’이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나는 아흔 넘어 다시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나. 만학도들에게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청력이 약해 보청기를 끼는 것 외에 다른 건강상 문제는 없다고 한다. 다음은 김 할머니와 일문일답.
-다시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울산시 온양면(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이 고향이다. 집안 형편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여자인데도 부모님이 국민학교를 보냈다. 그런데 근처에 중학교가 없어 갈 수가 없었다. 열여덟에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자녀, 손주를 돌보다 보니 60대 후반이 됐더라. 그때 복지관을 찾아 영어를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모르는 영어 단어를 암기하는 데 흥미가 생겼다. 그러다 2022년, 같이 사는 며느리(64)가 지역 신문을 들고 왔는데 문해 교육 기관 광고가 있었다. 내가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실을 아는 며느리가 신문을 가지고 온 거였다. 손녀가 전화해 등록을 하고, 중학교 1학년을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학교 다니는 게 힘들진 않았나.
“일주일에 4일씩 오후에 학교를 가야 했다. 국어·영어·수학 같은 과목을 3년 동안 들었다. 배우는 게 재미있어 힘들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하하. 방학 때도 집에서 공책을 펴고 영어 단어랑 문장을 썼다. 나는 신길동에 살고 학교는 5㎞쯤 떨어진 영등포구청에 있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번갈아 가며 등·하교를 시켜줬다. 고마운 마음이 크다.”
-학교생활은 어땠나.
“한 반에 20여 명 된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으니, 60대 동급생들이 나한테 ‘엄마,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 내가 공부하다가 지친 기색을 보이면 어린 동급생들이 ‘힘내요’라고 말해줬다. 선생님들께는 항상 웃으며 인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걸 물어보면 선생님들이 천천히 차근차근 알려줘 기쁜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이번에 졸업을 맞아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에, 작은 떡을 하나씩 학교에 돌렸다. 늦게나마 책거리를 했다. 하하.”
-어떤 공부를 더 할 생각인가.
“다행히도 건강이 허락해 중학교는 졸업했지만, 서울의 학력 인정 고등학교들은 집에서 멀어서 가기 어렵다. 그래도 공부는 계속하고 있다. 영등포구청에서 하는 영어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꿈이라고 한다면, 지역사회에 있는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영어도 이제 잘 읽으니, 영어책을 읽는 것도 좋겠다.”
- 다른 만학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늙었다’ ‘늦었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열심히, 꾸준히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김 할머니는 12일 서울교육청이 주관하는 문해 교육 기관 졸업식에서 ‘우수 학습자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