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노원구 청원여고 AI융합실. 2학년 학생 25명이 ‘인공지능(AI) 기초’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 노트북을 활용해 정보 교사가 내는 퀴즈를 풀며 알고리즘의 기본 원리를 배웠다. 박현희(17)양은 “앞으론 진로 상관 없이 AI는 필수로 알아야 할 것 같아 수강했다”며 “수업이 간단한 실습 위주로 진행돼 전문 지식이 없어도 쉽게 배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 수업은 청원여고가 올해 ‘고교 학점제’가 전면 도입됨에 따라 새로 개설한 ‘선택 과목’이다. 고교 학점제는 학생이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학점을 취득하는 제도다. 모든 학생은 3년 동안 총 192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학생들이 조기에 진로를 탐색하고 그에 맞는 수업을 듣게 해서 교육 효과를 높이자는 취지로 도입한 제도다. 1학년에 상담과 공통 과목 위주 수업을 들으면서 진로를 찾다가 학년 말에 희망 진로를 택하고 2·3학년 때 진로에 맞는 선택 과목 중심으로 공부한다.
청원여고는 학기당 선택 과목이 8개씩으로, 일반적인 다른 학교들(4~5개)보다 많은 편이다. 과학 세부 과목별 교사가 상대적으로 많고, 기존 교실을 리모델링해 대형 강의실, 컴퓨터실 등을 새로 마련한 덕분이다.
같은 재단 산하의 ‘청원고’와 협력도 큰 도움이 된다. 건물이 붙어 있는 두 학교는 ‘수학과 AI’ ‘고급 생명과학’ ‘고급화학’ ‘국제 경제’ 등 대학교 1학년 수준 심화 과목 4개를 공동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고교학점제에선 학교마다 개설하기에 수강 학생이 적거나 담당 교사가 없는 경우 인근 학교들과 공동으로 수업을 만들어 여러 학교 학생들이 함께 듣도록 한다.
하지만 청원여고와 달리 상당수 고교는 고교 학점제 도입으로 아직 혼란을 겪고 있다. 학교마다 과목별 교사 수와 교실 등 여건이 제각각이라 만족도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대부분 학교가 정부 방침에 따라 개설 과목 수는 늘렸지만, 전문 교사를 확보하지 못해 수업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 교사가 세 과목 이상을 강의하는 학교도 있다. 경기도 A고에선 지구과학 교사가 생명과학 선택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A고 학생은 “생명과학 수업을 유튜브로 해외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수도권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도보로 15분 이상 떨어진 다른 학교의 사회 과목 공동 수업을 듣기 위해 쉬는 시간 10분 사이 교사가 학생들을 택시에 태워 다니고 있다. 수업을 개설하기엔 해당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이 너무 적어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고등학교와 수업을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학교 측은 “이동 과정에서 학생 안전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다음 학기에는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부 ‘꼼수 운영’도 나오고 있다. 고교 학점제 시행으로 모든 학생은 3년 동안 과목별 학업 성취도가 40%를 넘어야 졸업할 수 있다. 40% 이하가 나오면 방학 때 보충 수업을 들어야 한다. 서울의 B고는 최근 모든 학생들에게 기본 점수를 높게 줘 40% 이하 점수가 나오지 않게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40% 미만 학생이 얼마나 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우니 기본 점수를 아예 높여 미이수를 막겠다는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고교 학점제 관련 정보가 부족하다”고 불만이다.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실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작년 12월~올 2월 겨울방학 동안 고교 학점제 관련 대면 설명회를 개최한 고등학교는 전체의 20% 수준이었다. 새 제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대치동 학원가에는 1년에 600만원이 넘는 ‘고교 학점제 전문 컨설팅 프로그램’도 생겼다.
☞고교학점제
학생이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 학점을 취득하는 제도. 2018년 100개 학교에 시범 도입됐고, 올해 모든 고등학교에 전면 도입됐다. 1학년은 공통 과목을, 2·3학년에는 진로에 맞는 선택 과목 위주로 수업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