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경기도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A양은 올해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다. 피해를 호소한 B양은 학교에 “A가 날 따돌리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둘은 원래 친구 사이였고 작은 다툼으로 사이가 멀어졌던 것뿐이었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에서 B양이 얘기한 피해 사실도 대체로 주관적 기분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A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웃는 걸 보는 게 괴롭다”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교내 안팎에선 “‘문제없음’으로 종결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런데 가해자로 지목된 A양 부모는 신고를 당하자마자 변호사를 선임했다. 혹시라도 학폭 처분이 나와 자녀의 대학 입시 계획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게 걱정됐기 때문이다. 두 달가량 심의를 준비하는 데 변호사 비용 500만원이 들었다. 결국 이 사건은 ‘학폭 아님’으로 결론 났다.

그래픽=이철원

코로나 때 잠잠했던 학폭 발생 건수가 다시 치솟고 있는 가운데 올해 고3이 치르는 2026학년도 대학 입시부터는 대학이 ‘학폭 가해 사실’을 입시에 감점 요인으로 의무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2023년 국가수사본부장 지명자 아들이 학폭 가해로 전학 처분을 받았지만 수능 위주의 정시 전형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사실이 드러나자, 처벌이 강화된 것이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선 이런 엄벌주의 대책의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A양처럼 아이들 간 단순 다툼이라도 대입에 불이익을 입을까 무조건 변호사부터 선임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처벌 강화에도 학폭은 줄지 않고 변호사 배만 불린다’는 비판이 나온다.

작년 대구 한 고등학생 C군도 친한 친구와 싸운 후 학폭 신고를 당했다. 친구가 서로 사이가 좋았을 때 욕설을 섞어가며 나눈 온라인 메신저 내용에서 C군이 보낸 부분만 발췌해 “학폭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지만 C군 부모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부모는 “학폭위에서 오해가 풀릴 거라 믿고 대비 안 했다가 경미한 처분이라도 나와서 대입에 문제가 생길까 불안했다”고 했다.

서울에서 학폭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는 D씨는 “재작년 정부의 ‘학폭 대입 의무 반영’ 대책 발표 이후 고교 학폭 관련 전화 상담은 2배, 수임은 1.5배 늘었다”고 말했다. D씨는 전화 상담 30분당 4만원을 받는다. 그런데도 하루에 10통 이상 걸려오는 날도 적지 않다고 한다. 다른 학폭 전문 변호사도 “학구열이 센 서울 강남과 목동의 학폭위는 거의 다 변호사를 끼고 진행되고 최근엔 강동, 송파 쪽에서도 변호사 선임해 대응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학폭 사건 한 건당 변호사 수임료는 최소 300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4000만원까지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부모들이 변호사부터 선임하는 것은 자녀 학폭위를 스스로 준비하는 게 막막하기 때문이다. 어떤 서류를 어떻게 제출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고, 학폭위 결과가 위원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지는 점도 불안을 부추긴다.

로펌들 중에는 ‘대입 불이익’을 앞세워 ‘불안 마케팅’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학폭 전문 변호사’를 검색하면 “학폭 대응 안 하면 대입 지장 생겨” “가해자 우리 아이, 대입 지키기 위해선” 같은 홍보 글이 100건 가까이 뜬다. 학부모들의 걱정과 불안을 자극해 변호사를 선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학폭 업무를 담당하는 한 교육청 관계자는 “최근 들어 학폭 사건 수임료가 오르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자녀 미래를 걱정하는 학부모들의 마음이 (변호사들에게) 이용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학폭을 이용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최근 시도교육청의 학폭 담당자들 모임에서 한 고등학교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다들 놀랐다고 한다. 해당 고교에서 시험을 2~3주 앞두고 학폭 신고 접수가 급증했는데, 진짜 학폭을 당한 게 아니라 경쟁 상대인 동급생을 심리적으로 힘들게 하기 위해 여러 아이가 신고한 것이었다고 한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일부 극단적 사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폭 사건은 일방적인 피해·가해자가 아닌 경우가 많은데도 ‘엄벌주의’라며 소송을 통한 승자를 가려내는 시스템을 학교에 끌어들인 건 무책임한 교육자 편의적 정책”이라며 “일본처럼 교사의 권위를 대폭 강화해 나가며 학생들의 사소한 분쟁은 교육적으로 처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