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 기아차 노조가 수억원을 들여 조합원들에게 나눠준 단체 티셔츠를 놓고, 조합원들이 구매 과정에 의혹이 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 “회계 장부를 보여 달라”고 주장하는 조합원들도 나왔다.
기아차 노조는 지난해 9월 노조 쟁의기금(투쟁기금) 4억6000만원으로 단체 반팔 티셔츠를 구매했다. 노조가 쟁의대책위원회를 열고 결정한 사안이다. 팔 부분에 ‘기아차노동조합’ 글자를 새겼고 조합원 약 3만명에게 돌렸다. 티셔츠 1장당 가격은 약 1만6000원이었다.
그런데 티셔츠를 받아본 조합원들 사이에서 대거 불만이 터져나왔다. 재질도 면보다 싼 나이론 86%·폴리우레탄 14% 합성인 데다 상당수 티셔츠의 라벨이 가위로 잘려있었다. 일부 티셔츠에는 엉뚱하게도 가구업체인 A사 이름이 적힌 라벨이 붙어 있었다. 일부 조합원들은 “쓰레기를 돈 주고 사 왔냐”며 티셔츠를 가위로 찢거나 ‘이게 1만6000원짜리냐. 개나 입혀라’는 등 문구를 티셔츠에 적어넣은 사진을 공유하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조합원들이 A사에 라벨이 붙어 있는 연유를 물었더니 “노조와 계약을 한 것은 우리가 아닌 협력업체”라며 “왜 우리 라벨이 들어갔는지 사실관계를 확인해 필요하면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했다. 기아차 노조는 “협력업체가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업자 실수로 일부 물량에 A사 라벨이 들어갔다”고 해명했다. A사는 본지 통화에서 “협력업체에 줬던 라벨 여유분이 노조 티셔츠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조합원들은 “혹시 재고품을 사온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A사 라벨이 적힌 재고품이었는데,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라벨을 자른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조합원들은 집행부에 회계 자료 열람을 요청했다. 티셔츠 관련 입찰 자료는 물론 지부장 월별 카드 청구 내역서까지 열람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부 조합원들은 “파업 때 쓰라고 모아 놓은 쟁의 기금으로 단체 티셔츠를 사는 게 말이 되느냐” “조합비를 유용한 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기아차 노조는 최근 소식지를 통해 “윤석열 정권이 민주노조 말살 정책을 시도하는 엄중한 시기에, 절차와 과정에 문제가 없는 티 관련뿐 아니라 그 어떤 회계 장부도 외부에 공개할 수 없다”면서도 “조합원이라면 노조에 요청해 열람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실제 일부 노조원이 사무실에 가서 자료를 열람할 때 사진 촬영은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의혹은 또 있다. 기아차 노조가 단체 티셔츠를 사기로 결정한 건 작년 8월 23일이었고, 구매 방식은 공개 입찰이었다. 그런데 ‘기아차노조’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 샘플이 공개된 건 이보다 앞선 작년 8월 20일이었다. 입찰이 결정되기도 전에 업체가 샘플 티셔츠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조합원들은 “구매를 결정하기도 전에 티셔츠가 이미 나와 있던 것이 말이 되느냐”며 “티셔츠 배포가 시작된 것은 9월 초인데 수만장의 티셔츠를 업체가 며칠 만에 만들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일부 조합원은 국민신문고를 통해 노조 불법 행위가 의심된다며 진정을 넣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담당한 경기 광명경찰서는 이달 초 ‘범죄 혐의가 특정되지 않고 내용이 정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정을 반려시켰다. 조합원들은 지난 20일 재수사를 요구하며 국민신문고에 다시 진정을 넣은 상태다.
일반 조합원들에게는 티셔츠를 지급한 노조가 간부에 해당하는 대의원들에게는 고가의 전기 그릴을 배포하려하는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기아차 노조는 정기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지난 20일 대의원 900명에게 인터넷 최저가 19만원 상당의 전기 그리를 주기로 결정한 상태다. 기아차 노조는 최근 소식지를 통해 “지급된 티셔츠가 조합원들이 선호하는 색상이나 디자인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이미 절차와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진 상황”이라며 “(의혹 제기는) 일부 조합원의 일방적인 행동”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아차 노조는 본지 통화에서 “단체 티셔츠는 단결을 위한 것이라 쟁의 기금으로 사는 데 문제가 없고, 노조로 찾아온 조합원들에게도 회계 자료 등을 충분히 볼 수 있게 해 줬다”며 “의혹은 모두 추측일 뿐 사실이 아니고, 경찰도 조사 요구를 반려했다”고 했다. 또 “샘플은 입찰에 참여한 업체가 미리 만든 것”이라고 했다.
앞서 현대차 노조에서도 지난 2006년 조합원 선물을 둘러싼 비리 사건이 터진 적이 있다. 노조 창립일 기념품으로 소풍 테이블 4만4000개를 개당 약 1만원에 사서 나눠주기로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업체가 납품한 제품은 이보다 저가의 중국산 제품이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집행부가 형사처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