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오후 2시 10분 서울동부지방법원 401호 법정. 언뜻 봐도 100㎏가 넘어 보이는 거구의 젊은 남성이 푸른 수의(囚衣)를 입고 교도관이 미는 휠체어를 탄 채 법정에 들어섰다. 익명 채팅 앱으로 만난 17세 여학생을 성적(性的)으로 착취한 혐의로 이날 선고 재판을 받는 박모(31)씨였다. 박씨는 작년 7월 익명 채팅 앱에서 만난 여학생을 회유해 몸에 성적 의미가 담긴 낙서와 음란 행위를 하게 했다. 이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자신에게 보내도록 하고 이를 소지하고 있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피해 여학생은 후유증으로 우울증 치료가 필요한 상태다.
서울동부지법 형사12부(재판장 박상구)는 이날 박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장이 주문을 선고하자 방청석 곳곳에선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공판 검사는 분을 참지 못한 듯 피고인을 노려봤다. 재판장은 “박씨가 범행을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와 합의했으며 당뇨병을 앓는 점 등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신상 정보를 공개하고 아동·장애인 시설 등에 취업 제한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법원은 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속 수감됐던 박씨는 이날 판결로 즉시 석방됐다. 피해자 아버지 A씨는 판결 직후 법정 밖에서 “피해자가 자기 자식이었어도 이렇게 판결을 내렸을 건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동·청소년 8명을 포함한 여성 피해자 25명을 협박해 성 착취물을 촬영하고 비밀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판매·유포한 ‘박사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 일당이 검거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상당수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줄줄이 풀려나고 있다. 조주빈(별명 ‘박사’), 강훈(부따) 등 언론을 통해 알려진 주범들에게 내려진 중형에 관심이 쏠리는 사이, 뚜렷한 성적 가해를 일삼고도 ‘초범이라’ ‘범행을 반성해서’ ‘피해자와 합의해서’ 등의 갖은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성 착취물을 비밀리에 사고파는 이른바 ‘n번방’ 관련 사건으로 기소된 이들을 포함해 201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음란물 유포죄로 기소된 315명 중 92%인 290명이 1심에서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다. 이 중 ‘n번방’ 사건처럼 불법으로 촬영한 영상을 유포해 기소된 51명 역시 43명(84%)이 벌금형,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성 착취물을 직접 제작하는 등 범행에 적극 가담한 자에게도 집행유예 처분이 내려진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익명 대화 앱을 통해 11세 여아(女兒)에게 접근해 성적 착취물을 제작한 20대 남성 역시 작년 6월 서울 동부지법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남성은 2019년 3월 익명 채팅 앱을 통해서 만난 피해 아동을 윽박질러 옷을 벗게 하고, 신체 특정 부위에 ‘오빠만의 성노예’ 등의 문구를 적게 한 뒤 19차례나 신체가 노출된 사진을 찍도록 강요했다. 또 카메라 앞에서 각종 음란 행위를 하는 영상을 8차례에 걸쳐 찍어 전송하도록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초범이고 범행을 인정하고 있으며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디지털 성범죄 양형 기준’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성착취물 제작은 기본 5~9년의 징역에 처하게 돼 있다.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초범인 경우, 2년 6개월~6년으로 감경할 수 있다. 단순 구매자 역시 10개월~2년에서, 감경 요소를 감안해도 6개월~1년 4개월의 징역을 내리게 돼 있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는 “양형 기준은 참고하는 용도일 뿐 반드시 양형 기준대로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피해자들은 이런 솜방망이 처벌에도 끝까지 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재판에 수차례 출석해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걸 심적으로 매우 힘들어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성 착취 피해자들은 후유증 때문에 생업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생계 곤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의금을 받고 항소하지 않기도 한다”고 했다.
공익인권법재단공감의 백소윤 변호사는 “집행유예 판결은 가해자에게는 승리의 경험을, 피해자에게는 패배의 경험을 학습시킨다”며 “일반적인 감형(減刑) 사유를 관성적으로 적용해 형을 낮춰주면 비슷한 범죄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