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자녀의 성(姓)을 정할 때 아빠의 성을 우선적으로 따르도록 한 ‘부성(父姓) 우선주의 원칙’을 폐기하는 법 개정을 추진한다.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은 관계 말고도 비혼(非婚) 1인 가구, 노년 동거, 위탁 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생활·재산 등 지원 방안을 확대하기로 했다.
여성가족부는 27일 이런 내용을 담은 ‘제4차 건강가정 기본 계획’이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됐다고 발표했다. 향후 5년간 정부가 추진할 가족 정책 방향을 정리한 것으로 1인 가구 증가와 가족 형태 다양화, 젠더 갈등 지속 등 시대 변화에 대응하는 게 핵심 취지다.
현행법에서도 자녀가 엄마 성을 따를 수는 있다. 혼인신고할 때 부부가 협의해서 엄마 성과 본을 따르겠다고 서류에 적으면 된다. 문제는 혼인신고 기간 외에는 무조건 아빠 성을 따라야 한다는 점. 정부는 이런 ‘부성 우선주의' 원칙이 한 부모 가정이나 재혼 가정 등에 차별이라고 보고, 자녀 출생신고를 할 때 누구 성을 따를지 부모가 협의해서 정하도록 법을 개정할 방침이다. 미혼모가 엄마 성(姓)으로 자녀를 키우다가 아빠가 나타나면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아빠가 합의해주지 않으면 아빠 성으로 바뀌는 게 원칙이고, 엄마 성을 계속 사용하려면 법원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를 손질해 앞으로는 법원 허락 없이 엄마 성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 밖에 혼외자와 혼중자(혼인 중 출생자)로 출생아를 구분하는 방식도 폐기를 검토한다.
비혼 커플, 노년 동거, 위탁 가정까지… ‘가족’ 형태 다양해진다
여성가족부가 27일 발표한 ‘제4차 건강가정 기본 계획’의 핵심 과제는 ‘세상 모든 가족을 포용하는 사회 기반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혼인율이 줄고 만혼(晩婚)이 보편화돼 1인 가구 비율이 2010년 23.9%에서 2019년 30.2%로 급격히 늘어나는 등 사회 구조가 크게 바뀌었는데, 정부의 가족 정책은 여전히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부’를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본 것이다. 여가부는 “향후 5년간 비혼(非婚)·동거 가구, 위탁 가정, 서로 돌보며 생계를 함께하는 노인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이들을 위한 정책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가족 범위 확대
정부는 우선 혼인·혈연·입양 관계만 가족으로 인정하는 민법과 건강가정지원법(건가법)을 개정할 계획이다. 현행 민법 779조는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형제자매’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 혈족, 배우자의 형제자매’로 규정한다. 정부는 이 조항을 삭제해 가족 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는 방안을 추진한다. 또 건강가정기본법의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기본 단위’라는 가족 정의 조항도 삭제할 계획이다. 혼인이나 혈연 관계가 아니라도, 함께 돌보면서 생계를 함께하는 다양한 관계도 가족으로 인정하자는 취지다. 동거커플뿐 아니라,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이나 학대 피해 아동을 돌보는 위탁 가정 등도 해당된다. 여가부 관계자는 “민법·건가법의 조항은 다른 법이나 정책에 실질적 영향력이 없는데도 혼인·혈연 관계 이외 가족에게 차별로 인식될 수 있어 삭제하는 게 맞는다”고 밝혔다.
◇미혼 부모 차별 개선
이와 함께 정부는 출생 신고 때 ‘혼외자’와 ‘혼중자’를 구분하도록 한 가족관계등록법과 민법도 개정한다. 미혼부의 출생 신고 요건도 완화된다. 기존에는 혼외자가 태어날 경우 원칙적으로 엄마가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미혼부가 신고를 하려면 아기 엄마의 이름·주소 등 인적 사항을 모를 때에만 가능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미혼부가 아기 친모의 정보를 알고 있더라도 협조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출생 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가정폭력처벌법상 ‘배우자’의 범위에 ‘비혼 동거’ 등 친밀한 관계도 포함하도록 법 개정을 검토한다. 현행법은 법적 혼인 관계와 사실혼만 포함한다. 또 가정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방송인 사유리씨 경우처럼 미혼 상태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자녀를 출산하는 경우 의료비를 지원할지 여부 등에 대해서도 논의에 나선다. 여가부 측은 “우선 보조생식술을 이용한 비혼 단독 출산에 대한 법, 윤리, 의학 등 쟁점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1인 가구에 대한 지원도 확대하기로 했다. 혼자 사는 노인에게 ‘가사 관리 교육’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한다.
정부는 또 혼인 여부와 가족 형태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가칭) 평등 및 차별 금지에 관한 법률’도 제정하기로 했다.
◇주거·의료 권리 보장도 논의
정부는 비혼·동거 가족들이 혼인·혈연 관계 가족들처럼 주거·의료 등 각종 권리를 보호받는 방안도 검토해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비혼·동거 커플도 아파트 분양에서 ‘신혼 부부 특공(특별공급)’ 자격을 줄지 등을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또 연금이나 사회보장제도에서 유족과 피부양자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도 중장기적으로 논의한다. 여가부 측은 “상속·재산·연금 등 권리를 보장받는 가족 범위를 넓히는 데는 상당한 예산이 필요하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중장기 논의 과제”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가족 정책들이 5년 안에 실현되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대부분 법률 개정 사안인 데다, 종교계 등이 반발하는 쟁점들도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