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우가 누구야?” “축구 선수 황선홍을 잘못 적은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우리나라 수영 출전 안 했잖아.” 지난 27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도쿄올림픽 수영 종목에 출전한 황선우(18) 선수를 놓고 때 아닌 ‘선문답’이 벌어졌다. ‘남자 자유형 100m 예선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는 글이 올라오자, 2시간 만에 달린 460여 댓글이 하나같이 이랬다. 갑자기 주목받게 된 어린 선수가 성적에 부담을 느낄까 봐, 마치 약속이나 한듯 그를 모르는 척하는 댓글을 줄줄이 단 것이다. 이들은 ‘황선우의 소셜미디어 계정에도 찾아가지 말자’고 했다. 29일 황선우가 자유형 100m에서 최종 5위로 경기를 마치고 나서야 이들은 선수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축하했다. “괴물 황선우, 세계에서 5위! 메달은 못 땄지만 진짜 잘했습니다.” “메달이 뭐가 중요해, 너무 잘했고 앞으로 더 기대된다.”
금메달에만 열광하고 은메달 따면 아쉬워했던 게 우리에게 익숙한 올림픽 풍경이었다. 이번 올림픽에선 그런 모습이 달라졌다. “우리가 원했던 색의 메달이 아니다”라고 한 방송 캐스터가 역풍(逆風)을 맞고, 온라인에서도 국위 선양보다 선수 개개인의 스토리와 스포츠맨십에 더 주목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Z세대의 ‘올림픽 관전법’이 만든 변화다.
이번 도쿄올림픽은 한국의 메달 순위가 크게 화제가 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대학생 이모(24)씨는 “올림픽 메달 순위표를 가끔 보긴 하지만, 우리나라가 대강 어디쯤인지 구경하는 정도”라며 “인구도 적고, 땅도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다양한 종목에 출전해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많다는 사실 자체로 대단할 뿐, 순위는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매일 올림픽 경기를 챙겨본다는 직장인 홍예찬(28)씨는 “메달을 따느냐보다, 선수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세계 1위를 상대로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올림픽에선 ‘국가의 성공’보다는 ‘개인의 노력’을 평가하고 즐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며 “요즘 젊은 세대는 외국과 비교하기보다는 우리 문제를 우리 시각으로 보는 세대라 세계 랭킹에도 연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Z세대의 응원은 과거처럼 한국 선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승패와 무관하게 훌륭한 매너와 스포츠맨십을 보인 타국 선수들도 이번 올림픽에서 갈채를 받았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대학생 김윤수(26)씨는 “신유빈 선수와 싸웠던 58세 룩셈부르크 탁구 선수가 경기 때는 예민하게 굴었지만, 지고 난 뒤에 깔끔한 승복 인터뷰를 한 것이 참 멋지고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룩셈부르크의 니시아리안(58) 선수는 패배 후 인터뷰에서 “오늘의 나는 내일보다 젊다. 계속 즐기면서 도전하라”는 말로 한국 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변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Z세대에겐 ‘승패’보다 ‘스토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박종민 경희대 미디어학과 교수는 “소셜미디어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 개개인의 사연이 소개되며 스토리텔링이 힘을 얻었다”며 “한국 선수가 아닌 외국 선수의 사연도 쉽게 전달되기 때문에, 스토리가 재밌고 스타성이 있으면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했다.
또 하나의 화두는 ‘공정’이다. Z세대 관중은 선수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자신의 일처럼 분노하며 힘을 보탠다. 28일부터 대한양궁협회 홈페이지에 국가대표 안산(20) 선수를 보호해달라는 글이 5000건가량 올라온 것도 이 때문이다. 안 선수의 짧은 머리(쇼트커트)와 과거 소셜미디어에 썼던 표현을 두고, 일부 남성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스트” “남성 혐오주의자냐” 등의 공격을 하자 팬들이 “선수가 남은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 협회 차원에서 대응하라”며 힘을 보태고 나선 것이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쟁하고, 1등만 인정받는 사회였던 한국이 경제·문화적으로 성장하면서 생긴 변화”라며 “여러 시도와 실패를 경험한 젊은 세대가, 실패해도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