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에 사는 대학생 나모(23)씨는 자기 전 중고거래 앱을 열어보는 게 습관이다. 딱히 살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소셜미디어 보듯 쭉 화면을 넘겨보다가 ‘이거 괜찮네’ 싶으면 사고, ‘나도 하나 팔까’ 싶으면 곧바로 스마트폰으로 방 안의 물건 사진을 찍어 1분여 만에 올린다. 그렇게 이달에만 3만원짜리 핸드크림 새 제품과 40만원 상당의 중고 명품 벨트를 샀고, 선물받았지만 쓰지 않던 향수 두 개를 팔았다.
꼭 물건만 사고파는 것도 아니다. 프로야구 기아 팬인 그는 동네 주민이 올린 ‘직관팸 모집’이란 글을 보고 연락해, 함께 모여 맥주 한잔하며 야구 경기를 볼 수 있는 동네 친구도 사귀었다. 그는 “하루 5번 정도는 들어가서, 물건도 구경하고 사람도 만나고 최신 뉴스도 접한다”고 했다.
중고 거래가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일상(日常)이 되고 있다. 과거 중고 거래는 남이 쓰던 물건을 싸게 사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행위였지만 이젠 심심해서 사고팔고, 이를 통해 용돈도 벌고 사람도 만나는 소소한 여가처럼 자리매김하고 있다. 실제로 중고 거래 앱 당근마켓에 따르면 이용자들은 월평균 64회 앱에 접속해, 2시간 2분을 머문다. 국내 주요 중고 거래 앱인 중고나라·당근마켓·번개장터 등 3사의 회원 수는 각각 2450만·2200만·1644만명이다. 중복을 감안하더라도 국민 절반가량은 ‘중고’를 매개로 논다는 뜻이다.
중고 거래 특성상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유통업계에선 지난해 온라인 중고 거래액 규모를 약 20조(兆)원으로 추정한다. 한국 한 해 예산(약 600조원)의 30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이제 중고 거래는 단순히 일부 알뜰족(族)의 ‘쓰던 물건 싸게 팔기’ 수준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요즘 중고 앱에는 중고는 물론 새 제품, 재테크를 위한 한정판 리셀(resell·재판매) 등 갖가지 물건이 올라온다. 중고 거래 앱 당근마켓의 이용자 연령대는 1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전(全) 연령대에 고루 퍼져있다.
중고 거래는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가성비’와 ‘희소성’을 모두 갖췄다. 직장인 김모(25)씨는 “중고 거래 앱에서 괜찮은 물건이 사이즈까지 맞으면 ‘득템’이란 생각이 들어 바로 구매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김홍식(26)씨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온라인 쇼핑몰보다 중고 앱을 먼저 찾는다. 그는 “코로나가 시작한 작년 2월 이후에 산 모든 재킷, 반바지, 구두 등은 모두 중고 거래로 구한 것”이라고 했다.
중고가 대세가 되면서, 많은 제품에 ‘정가’와 ‘중고 정가’가 따로 매겨지고 있다. CGV 등 대형 영화관 영화표들이 대표적이다. 원래 정가는 1만1000원 안팎이지만, 중고 거래 앱에선 6500~7000원이 정가로 통한다. 통신사 VIP 회원 등에게 제공되는 무료 티켓을 정가의 60% 남짓한 가격에 파는 것이다. 충남 천안시에 사는 강모(38)씨는 “보고 싶은 영화와 시간, 좌석번호를 골라 알려주면 판매자가 영화를 대신 예매해서 예매번호를 보내주는 방식”이라며 “제 돈 내고 영화 보면 손해”라고 했다.
최근 일부 기업 인사팀은 ‘중고 경계령’을 내렸다고 한다. 임직원들에게 복지 혜택으로 싸게 파는 자사(自社) 물건을 중고로 되팔아 이익을 얻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런 행위가 적발되면 3년간 임직원몰 사용 권한을 박탈하고 징계 처리한다. 신세계도 임직원몰에서 ‘재판매 금지’를 경고하고 있다.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보통 사내 판매 제품의 일련번호나 판매자 연락처 등을 검색해 색출 작업을 벌인다”고 했다.
동네 직거래가 잦아지면서 아파트 단지들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차량 차단기뿐 아니라 공동현관 문까지, “중고 거래 왔으니 문 열어주세요”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외부인들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손모(69)씨는 “택배 기사에 음식 배달원, 중고 거래 하는 사람들끼리 저마다 ‘문 열어달라’고 하는데 무작정 안 열어줄 수도 없고, 자칫 범죄 우려도 있고 해서 애로가 많다”고 했다. 일부 아파트 단지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당근’(중고 앱)이 만능키도 아니고 무조건 문 열어주면 안 된다” “중고 거래한다고 현관 비밀번호 공유하지 말자” 등 불만 글이 올라온다. 이런 민원이 지속되자, 서울 송파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는 잠깐의 중고 거래라도 반드시 입주자가 사전(事前) 방문차량 등록을 해준 경우에만 외부인을 출입시키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세금 사각지대’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일반적인 중고 거래는 비과세지만 최근 수천만원짜리 보석이 중고 거래 앱에서 거래되고, 일반 사업자들이 중고 거래 앱에서 현금 거래를 하는 등 탈세의 통로가 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대지 국세청장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구체적인 과세 기준을 정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