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검열 테스트’란 제목과 함께 야한 영상이 포함된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이용자들이 수영복 차림의 젊은 여성, 짧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비롯해 유사 성행위를 하는 성인 음란물까지 각종 야한 영상을 게시했다가 몇 분 뒤 스스로 삭제하는 일을 반복한 것이다. 카카오톡의 공개 대화방인 오픈채팅방에도 ‘N번방 검열 테스트방’과 같은 제목이 달린 대화방 수십개가 만들어졌다. 여기서도 이용자들은 야한 영상 등을 잇따라 공유했다.
이는 지난 10일 소위 ‘N번방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 및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시행된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개정안의 골자는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 범죄였던 ‘N번방 사건’의 재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정부가 ‘연매출 10억원 이상’ 혹은 ‘일평균 이용자 10만명 이상’의 국내 인터넷 사업자에게 불법 촬영물(영상) 유통 여부를 사전에 확인하도록 한 것이다. 네이버, 카카오뿐만 아니라 디시인사이드, 뽐뿌 등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대상이다. 이 업체들은 10일부터 정부가 개발한 ‘불법 촬영물 확인 기술’을 적용 중이다. 이용자가 보내려는 영상을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불법 촬영물로 심의·의결한 영상 수천건과 유사한지 비교한 뒤에야 게시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자 이용자들이 “대체 어느 수위 영상까지 검열되는지 보자”며 카카오톡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소위 ‘야한 영상 테스트’에 나선 것이다. 소위 이런 ‘카톡 검열’을 거치는 데 수초가 걸린다. 정부 스스로 “전 세계 최초”라고 밝힌 초유의 제도다.
카카오톡의 일대일 대화방, 가족·지인들이 모인 단체 대화방 등 사적(私的) 대화방은 검사 대상이 아니다. 모두에게 공개돼 있는 카카오톡의 ‘오픈채팅방’,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 등이 대상이다. 한 이용자는 “불법 촬영물은 이해하지만 여성 아이돌이나 국내 BJ(인터넷 방송 진행자)가 춤추는 영상까지 확인을 거쳐 올려야 하느냐”고 했다.
정부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영상이 유통되는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다만 이용자들 사이에선 “N번방 막겠다고 전 국민 통신을 검열하는 위헌적 조치”라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기자가 12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제주도 앞바다를 찍은 11초짜리 영상을 공유하려 하자 ‘불법 촬영물 등 식별 및 게재 제한 조치 안내’라는 공지와 함께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방심위에서 불법 촬영물 등으로 심의·의결한 정보에 해당하는지 검토 중입니다’라는 안내가 떴다. 설악산에서 찍은 풍경 영상, 음료수를 컵에 따르는 영상을 올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부 지침에 따라 불법 성범죄 영상이 아닌지 한 차례 확인을 거친 뒤에야 공유·게시가 허용됐다. 기존에는 10초 안팎 분량의 영상을 공유하는 데 1~2초 정도면 됐는데, 이번 조치가 적용되면서 짧게는 3초에서 길게는 10여 초가 걸렸다. 네이버·카카오·디시인사이드 등 업체들은 불법 성범죄 문제를 발견하면 곧바로 당국에 신고해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연평균 매출의 최대 3%를 과징금으로 내야 한다.
이용자들 사이에선 “헌법상 보장된 통신의 비밀을 침해한 사생활 검열이다” “국민을 감시하는 중국과 다른 게 뭐냐” 등 거센 반발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방통위 관계자는 “피해자들은 인터넷에서 반복 유통되는 불법 촬영 영상물의 삭제를 간절히 원한다”며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성범죄물의 재유통으로 인한 2차 피해를 방지하자는 게 법의 취지”라고 했다. 검열 논란에 대해선 “일대일이나 비공개 대화는 제한 대상이 아니고, 공개된 인터넷 글에만 한정하기 때문에 검열이 아니다”며 “내용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정부가 모은 동영상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불법 영상물인지 아닌지를 걸러내는 기술”이라고 했다.
법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방법의 실효성이 낮고 형평에도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범죄 영상이 대거 유포됐던 소위 N번방 사건의 진원지였던 메신저 ‘텔레그램’은 이번 검사 대상에서 빠진 게 대표적이다. 국내 서비스만 차별적 제재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미 오픈카톡방에선 “검열 안 되는 텔레그램으로 망명하자”며 텔레그램방 주소가 공유되고 있다. 또 불법 성범죄물을 공개된 대화방에서 주고받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방통위 관계자는 “해외 사업자를 제재 못하면 국내 서비스에서 일어나는 불법 행위마저 정부가 방치해야 한다는 뜻이냐”며 “텔레그램은 경찰이 잠입 수사나 해외 수사기관과 공조를 통해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대선 주자들도 논란에 뛰어들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12일 “N번방 방지법은 제2의 N번방 범죄를 막기엔 역부족인 반면, 절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검열의 공포’를 안겨준다”고 했다. 반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 11일 “사전검열이 아니냐고 반발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좋지만 모든 자유와 권리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대일 대화방이 아닌 다수가 참여한 오픈채팅방이라고 해서 사적 공간이 아니라고 하는 건 안일한 생각”이라며 “성착취물의 유통을 막기 위해 개인이 올리는 모든 영상을 검열하겠다는 발상으로 결국 개개인의 사생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이라고 했다. 이어 “범죄자들은 영상을 암호화하거나 결국 텔레그램 등으로 법을 회피할 것이라 실효성도 낮다”고 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통신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카톡방에서 오고 가는 메시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 자체가 통신의 비밀을 침해한다고 볼 수 있어 위헌적 요소가 있다”고 했다.
☞N번방 방지법
해외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성범죄 동영상이 유포된 이른바 ‘N번방 사건’ 이후 이 같은 불법 영상의 유통을 막겠다며 정부가 10일부터 시행한 법. 카카오톡 오픈(공개)채팅방,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 동영상을 올릴 때 해당 업체는 AI 기술 등을 바탕으로 불법 촬영물인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카카오톡 1대1 대화나 가족·지인 간 단체 대화방 등 사적 대화방은 검사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