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약 9223억원, 코로나 이전 2019년 3812억원의 두 배가 넘는다. 아트페어 ‘역대 최대 매출’, 경매 ‘역대 최고가’ 낙찰 뉴스가 쏟아진다. MZ 세대가 미술품 컬렉션 시장에 뛰어들며 시장이 비등점을 향해 간다.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정보를 공유하고, NFT를 활용해 1/N 투자를 한다.미술품 사기는 오히려 아는 사람이 더 쉽게 당한다. ‘3억원 그림을 1억에 살 수 있다’는 현혹에 속는 사람은 그림을 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렇게 당한 그림 콜렉터 김모씨의 사연을 소개한다. 김씨는 “부끄럽지만 남들은 당하지 말라”며 인터뷰에 응했다.
# 1. 아는 사람 통해 접근하더라
“교수님 그림 좋아하시죠? 한번 봐주세요.”
2018년 6월 6일 현충일, 제자인 구모 (50·건축설계사)씨가 그림 6점을 들고 찾아왔다. 동업자라는 중년 여성 한명도 동행했다. 습자지와 비닐에 겹겹이 싸인 포장을 조심스레 뜯어내자 그림이 나왔다. 이중섭의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천경자의 ‘에디오피아의 여인들’, 박수근의 ‘두 여인’. 교과서급 명작들이었다. 위작인가 싶어 살펴보니 액자와 캔버스는 낡아 부서질 듯했고, 캔버스 고정 핀과 벽걸이 철사는 녹슬어 있었다. 한 점당 3억~15억원을 호가하는 작품들이었다. “일단 실컷 보시라”며 두 사람은 그림을 집에 두고 떠났다.
말로만 듣던 명작을 덜컥 받아든 김모(63)씨는 한숨도 못잤다. “설레는 마음에 밤새도록 그림을 보면서 살까 말까 고민했다.”
# 2. 각종 증명서와 ‘기밀’을 증거로 대더라
며칠 뒤 제자와 함께 왔던 홍 모(60)씨가 도록(圖錄)과 감정서 등을 들고 다시 찾아왔다. 박수근 등 작가 사인을 살펴 본 문서감정서는 그럴 듯 했다. 2억~3억원 선인 천경자의 ‘에디오피아의 여인들’을 5000만원에 주겠다고 했다.
“왜 이렇게 싸게 파느냐”고 했더니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해방 후 미군 수사관으로 일하면서 수집한 미술품들인데,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맥아더재단을 통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라며 “오산 공군기지로 들어온 입고증도 있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도록엔 이런 스토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김씨가 속아넘어간 지점이다.
김씨는 대학과 사회단체 교수로 일하면서 20여년 동안 미술품 270여점을 모았었다. 그렇게 그림을 모은 사람이 왜 속았을까.
“연인에게 반한 것 같았다. 심지어 속아도 좋다는 마음이었다.” 선금 2000만원을 입금했다.
# 3. 점점 더 큰 걸 보여주더라
한달쯤 뒤 홍씨는 앞서 가져왔던 수준의 작품 14점을 더 싣고 왔다. 김환기의 ‘점화’, 이중섭의 ‘황소’… 마침 김씨의 집을 방문했던 또 다른 컬렉터인 사업가 박모(72)씨, 큐레이터 출신 이모(68)씨와 마주쳤다. 홍씨는 이들에게도 똑 같은 방법으로 작품들을 열심히 소개했다. C갤러리에서 발행한 보증서도 보여주고, J문서감정원이 발행한 작가 싸인 필적 감성서도 보여줬다.
박씨 일행은 그자리에서 김씨가 선금을 낸 작품까지 모두 20점을 한꺼번에 사겠다고 제안했다. 가격은 100억원, 부족한 돈은 경기도 양평군의 시가 40억원짜리 땅문서를 잡히겠다고 했다. 홍씨는 사는 쪽이 직접 감정하겠다는 제안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1주일 뒤, 박씨는 감정전문가 5명을 데리고 왔다. 감정이 시작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감정인들이 말했다.
“위작입니다. 창피당하십니다. 이런 거 손대지 마세요.”
김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 4. 들통나면 다른 ‘증거’를 내밀더라
김씨가 “선금 2000만원 내놓으라”고 따지자 홍씨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갤러리에 직접 가보자”고 했다.
그와 함께 경기도 남양주 한적한 도로가에 있는 4층 건물에 도착했다. 1층은 S갤러리였다. 피카소, 램브란트, 달리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S갤러리 관장 이모(56)씨가 “2개월 내로 한국화랑협회 감정서를 떼 주겠다”고 했다. 김씨는 또 흔들렸다. “내가 직접 화랑협회 감정을 넣어봐도 되겠나?”. 홍씨와 이씨가 흔쾌히 승락했다.
며칠 후, 김씨는 미심쩍은 마음에 몇차례 이 갤러리를 찾았다. 몰래 차에 숨어 드나드는 사람들과 차량을 살폈다. 그러던 어느날 4층 창고에서 세계적인 명화라던 그림들이 수십점 트럭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2층에는 그림을 그리다 나온 듯한 미술작업용 앞치마 차림의 남자가 들락거렸다.
800만원을 들여 화랑협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5점 모두가 위작으로 판명났다. 그해 10월 김씨는 홍씨와 이씨를 사기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 5. 위작 사기, 법은 피해자 편이 아니더라
고소장 접수 후 1년을 기다렸지만 검찰에서는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김씨는 “남양주 갤러리를 압수수색 하면 증거를 잡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매달렸는데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무혐의 처분을 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2019년 11월 고검장 출신 변호사를 선임해 항고 절차에 들어갔다. 만 2년이 지난 2021년 12월, 홍씨 일당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왔다.
홍씨와 이씨의 혐의는 모두 ‘사기 미수’. 홍씨가 징역 6개월, 이씨 징역 1년형이 각각 선고됐다.
재판부는 “미술품과 도록, 감정서, 명함 등을 모두 가짜로 만들어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한 점, 앞서 다른 사기 사건으로 급전이 필요하자 또 다른 사기 범행을 시도한 점 등이 죄질이 나쁘다”면서도 “위작임이 빨리 드러나 실제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점은 유리한 정상”이라고 했다. 사기꾼은 맞지만 피해자가 피했으니 죄가 크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갤러리 관장 이씨는 또 다른 미술품 사기 사건으로 100억원대 피해를 입혀 이미 지난 2020년 5월 징역 7년형이 확정됐다.
김씨는 아직도 천경자 ‘에디오피아의 여인들’을 사려고 건넨 선금 2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김씨에게 그 돈은 그리 큰 돈은 아니다. 그가 아직도 분을 못 삭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내가 사기꾼을 내 지인들에게 소개한 거 잖아요. 제 잃어비린 신용, 이걸 생각하면 아직도 정신이 아득합니다.” 사기 피해자들이 겪는 낮은 자존감, 김씨도 예외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