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 1년 차인 유모(26)씨는 5년째 사귀는 남자 친구가 결혼하자고 조르고 있지만 아직 망설이고 있다.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다르고,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달라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비위 사건을 두고도 크게 다퉜다. “피해 본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며 우기더라고요. 페미니스트를 ‘남자 친구 못 사귀면서 분풀이만 하는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에 크게 실망했어요.”
중소기업 회사원 강모(28)씨는 급등한 집값 탓에 30세로 계획했던 결혼을 미뤘다. 여자 친구가 있지만 “주변 커플들을 보면 벌이가 비슷해도 남자가 집을 마련해가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라며 “혼자 모은 돈으로는 전세 마련도 어렵다”고 했다.
20대 남녀는 결혼을 희망하면서도 서로 다른 이유로 결혼을 망설였다. 조선일보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만 16세 이상 남녀 1786명에게 설문한 ‘2022 대한민국 젠더의식’ 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희망한다’는 20대 남성은 47.6%로 여성(33.6%)보다 많았다.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는 서로 달랐다. 20대 남성 47.2%가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아서”라고 답한 반면, 20대 여성 31.8%는 ‘결혼이 나의 자유를 제약해서’라고 답했다.
특히 청년세대 여성은 상대의 조건은 물론 ‘사고방식’까지 꼼꼼히 따졌다. 본지가 결혼 정보 업체 선우에 가입한 남녀 회원 690명에게 ‘이성과 교제를 결정할 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인지 묻자, 20·30대 여성 10명 중 9명(93.8%)이 ‘상대의 성 평등 의식이 낮으면 사귀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79.7%는 ‘상대의 소득이 자기보다 낮으면 싫다’고 했다. 학력이 낮은 것(56.3%), 정치 성향이 다른 것(53.1%), 종교가 다른 것(50.8%)도 이유가 됐다.
조선일보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20·30대 여성의 64.5%가 반대했다. 실제로 서울 한 대형 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박모(26)씨는 “결혼을 하면 내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할 것”이란 이유로 비혼(非婚)을 택했다. 나중에 국제기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그는, “배우자가 생기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그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내 삶에 다른 이해관계자가 생기는 것이 싫다”고 했다. 중소기업 회사원 박모(27)씨 역시 6년 넘게 사귄 남자 친구가 있지만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1위가 나, 2위가 가족, 3위가 경력이고, 결혼은 4순위”라고 했다.
젊은 여성들은 또, 결혼이 남성에게만 득이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맞벌이를 해도 가사, 육아 부담을 여성이 훨씬 더 많이 지는 탓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맞벌이 부부의 경우 여성은 가사 노동을 하루 평균 3시간 7분 한 반면, 남성은 54분만 했다.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독박 가사, 독박 육아에 운다” “맞벌이인데 집안일은 내가 다 하고 남편은 설거지 하나 하고 생색낸다”는 토로가 잇따른다.
결혼을 희망하는 여성들도 ‘남성에게 종속되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내년 결혼하는 공무원 이모(29)씨는 신혼집 전세 자금도 남자와 절반씩 부담하고, 결혼식과 신혼여행에 드는 비용도 커플 통장에 절반씩 넣은 돈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이씨는 “남자라고 비용을 더 많이 내는 게 싫다”며 “공평하게 부담해야 가정에서 내 발언력도 세지고 가사·육아 부담도 똑같이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지방 한 방송사에서 일하는 김모(30)씨는 3년 사귄 남자 친구와 올 연말 결혼한다. 서울로 근무지를 옮길 계획이었던 그는 당초 결혼 생각이 없었지만, 남자 친구가 ‘네 꿈을 위해서라면 나도 서울로 임지를 옮기겠다’고 해 마음을 바꿨다. 김씨는 “결혼이 내 꿈에 걸림돌이 된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특별취재팀〉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김연주 사회정책부 차장, 변희원 산업부 차장, 김경필 정치부 기자, 유종헌 사회부 기자, 유재인 사회부 기자, 윤상진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