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는 대학생 노서진(20)씨는 여성이지만 게임 속에선 ‘조덕춘’ ‘곽두팔’ 같은 별명을 쓰며 남성인 척한다. 진짜 성별이 드러날 경우 남성 플레이어들에게서 쏟아지는 욕설과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서다. 1억명이 넘는 전 세계 이용자가 무작위로 5대5 편을 이뤄 맞붙기를 반복하는 이 게임에서 노씨의 전적(戰績)은 상위 1% 안팎에 속한다. 그러나 노씨가 여성임을 감추지 않으면, 남성 플레이어들은 경기를 하기도 전부터 “오빠들한테 얼마나 (몸을) 대줘서 여기까지 왔느냐” “여자면 빨래나 하라” 같은 조롱을 한다. 팀이 지면 무조건 여성 플레이어 탓. 노씨는 “일단 여자니까 네가 잘못이지”란 말도 들어봤다고 했다. 노씨에게 자기 집 주소를 보내며 만나자고 하는 경우는 게임 경기 두 번에 한 번꼴로 벌어졌다.
과거에 게임은 젊은 남성들의 놀이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남녀노소 모두가 게임을 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1 게임 이용자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71.3%는 1년에 1번 이상 게임을 한다. 20대로 내려오면 게임을 하는 비율이 남성은 96.2%, 여성은 74.4%까지 높아지고, 10대에서는 남성의 95.1%, 여성의 92.2%가 게임을 한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 공간은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의 장으로 변한 지 오래다. 상대의 부모를 욕하는 ‘패[悖倫]드립’은 흔한 일이다. 상대방의 나이, 출신 지역, 학력, 직업 등 모든 것이 공격 소재가 된다. 이는 요즘 인기 있는 게임들 특유의 경기 방식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PC방 통계 사이트 ‘더로그’에 따르면, 17일 현재 국내 PC방 이용자들은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와 ‘오버워치’를 하는 데 전체 접속 시간의 절반(49.7%)을 썼다. 그런데 이 두 게임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한 팀을 이뤄 상대 팀과 싸우게 한다. 그러다 보니 싸움에서 졌을 때는 ‘팀원 중 누군가의 실력이 떨어져서’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패배로 이어지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15~17세 남녀 7774명을 조사한 결과, 남학생의 22.2%, 여학생의 7.1%가 ‘팀이 이기기 위해선 게임을 못하는 사람에게 욕이나 혐오 발언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게임을 못하는 사람은 강퇴(게임에서 배제하는 것)를 당해도 된다’는 데에는 남학생의 25.5%, 여학생의 14.7%가 동의했다.
게임에서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문화는, 10·20대를 중심으로 여성 플레이어가 늘면서 언어 성폭력의 형태로도 가해지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게임 이용자 4명 중 1명(26.6%)은 게임상에서 성희롱이나 성차별을 경험했다. 피해자의 68.6%는 쪽지나 채팅으로 성적 욕설이나 공격을 받았고, 27.9%는 불쾌감을 유발하는 성적인 사진이나 동영상을 받았다. 26.5%는 음성 채팅에서 음담패설을 듣거나 성희롱을 당했다. 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여성 플레이어에게는 “목소리(음성 채팅) 켜 봐라. 예쁘냐” “너 페미냐” 같은 희롱, 성기와 관련된 욕설이 이어진다.
‘오버워치’를 플레이하는 김모(26)씨는 지인들과 경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음성 채팅을 꺼둔다. 목소리를 노출하지 않고, 남성 플레이어들의 “와, 여자야 여자” 같은 비아냥을 듣지 않기 위해서다. 음성 채팅을 할 때는 목소리를 남자처럼 변조해주는 앱을 사용한다.
남녀 갈등은 게임 콘텐츠 자체를 두고도 벌어진다. 한쪽에서는 주요 게임 제작사 임직원의 절대다수가 남성이고, 남성 플레이어들 선호에 맞춰 여성 캐릭터를 신체 노출이 심하게 디자인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반대편에선 일부 ‘페미니스트’ 또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제작자들에 의해 게임의 세계관과 스토리, 캐릭터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남성 혐오’ 성향을 보였다고 추정된 인사를 색출해 게임 제작사를 압박, 제작에서 배제시키는 일도 되풀이되고 있다.
〈특별취재팀〉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김연주 사회정책부 차장, 변희원 산업부 차장, 김경필 정치부 기자, 유종헌·유재인·윤상진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