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김씨는 지금 소송 중이다. 난생 처음으로 지난해 10월 법원에 소(訴)장을 제출했다. 2년 전 횡단보도 앞에서 일어난 접촉사고가 이렇게 법적 분쟁으로까지 이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김씨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법원에 도움을 청한 것”이라고 말했다.
‘쿵’소리에 80만원,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작년 8월 12일 오후 5시40분쯤 대구 달서구 한 횡단보도 앞. 승용차를 몰고 가던 김씨는 갑자기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급정거했다. 앞 바퀴 일부가 횡단보도를 물었지만 그래도 멈춰서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숨 돌린 김씨는 횡단보도 밖으로 물러나기 위해 후진기어를 넣고 브레이크에서 서서히 발을 뗐다. 그런데 이번엔 뒷차와 쿵! 접촉사고가 나버렸다. 김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보험사에 사고접수를 했다.
앞범퍼에 살짝 기스가 난 정도였지만 뒷차 운전자는 범퍼교체를 원했다. 출고된 지 7년이 지났고, 12만km를 탄 소형 승용차인데 수리비 견적만 80만원 넘게 나왔다. 김씨는 100% 자신의 잘못이다 싶어 보험처리 해줬다.
그러나 두달 뒤, 보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상대 차량 운전자가 사고로 몸이 아프다며 대인접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고도 경미했지만, 두달이나 지나 치료를 받겠다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인접수를 거부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보험사 측이 “꾀병이 의심스럽지만, 피해자가 아프다고 하면 치료비를 줄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보험료 할증도 안되는 정도이니 그냥 접수해주고 치료비 주는 게 낫다”고 설명한 것이다. 의심스럽지만 물어줘야 한다니 김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금감원 눈치보며 나이롱환자 ‘우쭈쭈’하는 보험사
절차상 보험사는 김씨가 접수를 거부하면 피해자에게 법(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등)에 보장된 손해배상 직접청구권에 대해 설명하고, 이에 따라 피해자가 청구하면 치료비를 지급하도록 돼 있다. 다만 과잉 청구 등 보험 사기를 뒷받침할 증거가 있을 때는 소송 등을 통해 지급을 거부하거나 이미 지급된 보험금을 반환할 수 있다.
하지만 보험사들은 대개 직접 소송을 꺼린다. 금융당국의 지침으로 회사 내에 소송관리위원회를 두고, 심의를 통해 소송 여부를 승인받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손해보험협회 공시자료를 보면, 전체 16개 보험사 중 보험금 청구 1만건당 1건 미만인 곳이 10개사에 이르고, 1~3건 사이가 4개사였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개인 상대 소송 자체를 자제하라는 분위기이고, 금융감독원 등에 민원이 제기되면 보험사는 입장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대부분 큰 금액 아니면 그냥 주고 마무리하려고 한다”며 “소송 남발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가 오히려 보험 사기를 눈감게 하는 셈”이라고 했다.
나이롱 환자 그냥 두지 않겠다..결론은 어떻게 될까
“금액이 적으니까, 귀찮고 복잡하니까… 나이롱 환자인지 뻔히 보이는데 모른척 해서야 되겠습니까.”
김씨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법무사를 찾아가 상담하고, 자기돈 50만원을 들여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시작했다. 보험개발원 자동차기술연구소에 속도별 충돌에 따른 상해 발생 정도를 확인하는 분석 검사도 의뢰해놨다. 보험사는 옆에서 도와주는 정도다.
소장이 잘 전달되지 않아 7개월이 넘도록 마냥 기다렸다. 최근 첫 재판 날짜가 다음달 중순으로 잡혔다. 그는 “작은 것들 하나 둘 그냥 지나치다 보면 나중에 큰 범죄로, 큰 문제로 되돌아오지 않겠느냐”며 “긴 싸움이 되겠지만 바늘 도둑, 소 도둑 만드는 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