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정문./조선일보 DB

앞으로 논문을 쓰지 않아도 서울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각 학과와 전공별 특성에 맞춰 학위 과정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고, ‘대학원 기피 현상’ 속 석사 학위를 따는 데 드는 시간을 줄여서 더 많은 학생이 대학원에서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라고 한다. 현재 국내 상당수 대학이 석사 학위를 받을 때 논문을 요구하고 있어, 서울대 조치가 대학가에 적잖은 영향을 줄 것이란 예상이 많다.

서울대 이사회는 29일 오후 일반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을 때 학위 논문을 의무적으로 제출하는 조항을 수정해, 논문 대신 실적 심사를 통해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학칙 개정안을 가결했다. 원래 서울대 일반대학원 학생은 석사 학위를 따려면 반드시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논문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의무가 없어지면서 내년 1학기 대학원 입학생부터는 단과대 방침 등에 따라 논문 대신 다른 것으로 연구 실적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논문보다 더 간결한 프로젝트 보고서나 시험 등이 거론된다. 서울대 관계자는 “어떤 것을 석사 학위에 대한 실적으로 인정할지 구체적인 내용은 향후 단과대별로 정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연세대와 경희대, 한국외대 등 주요 대학들은 일반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딸 때 학위 논문을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일부 대학의 특수대학원에서만 보고서나 시험 등으로 논문을 대체한다. 성균관대가 학과마다 석사 논문을 의무화할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는 게 이례적인 상황이다.

서울대 내에선 석사 논문 의무화를 없애면서 박사 학위까지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이게 돼 효율적이라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논문 작성 의무를 없애면 석사 학위를 따는 장벽이 좀 더 낮아지는 셈이라 대학원 기피 현상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미국 등에선 최근 석사 논문 제출을 생략하는 경우 박사 학위를 따는 데까지 통상 5년이면 되는데, 국내 대학원은 석사 취득에만 평균 3년이 걸려 해외 유학생들이 한국 대학원에 진학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 왔다고 한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소속 한 교수는 “미국 대학원과 우리 대학원 간 학생 교류가 체결돼 있는데 우리 학생은 미국에 가길 원하지만 미국 학생은 오래 걸린다며 아무도 한국에 안 오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학생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는 교수도 있다. 서울대 공과대학 관계자는 “학내 규제를 완화해 논문 외에도 여러 가지 선택지를 주게 되면 논문 대신 수업을 더 듣는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들한테 더 도움이 되는 걸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애초에 요즘은 석사 수준에서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논문을 쓰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해외에서는 적지 않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을 때 논문을 의무화하기보다, 학위를 받기 위한 조건을 다양화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 하버드대의 경우 공과대학 석사과정 등 일부 단과대학에서만 논문 제출을 의무로 한다. 예일대도 석사 논문 제출이 선택 사항이고, 연구 분야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으로 논문을 대체하는 게 가능하다.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있는 경영대나 공대 등의 석사 학위에만 학생들이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의 한 교수는 “대학원에서 순수 학문 기피는 심해지고 특정 학과에만 쏠림 현상이 나타날까 우려스럽다”면서 “자연·사회·인문대 등 순수 학문 교수들은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