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재정, 입학정원 등을 모두 ‘나눠 먹기식’으로 구조 조정하다 보니 대학들이 전부 ‘하향평준화’됐습니다. 이런 추세면 지금 경쟁력 있는 대학들도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영재 건국대 총장은 지난 5일 본지 인터뷰에서 “대학들이 자율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규제를 획기적으로 풀어줘야 한다”고 밝혔다. 2020년 9월 취임한 전 총장은 지난 3월부터 서울 지역 37개 대학 총장 모임인 ‘서울총장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전 총장은 건국대 화학과에서 학사와 석·박사를 땄고, 삼성SDI 종합연구소 LCD 연구팀장, 삼성종합기술원 디스플레이연구소 선임연구원 등을 거쳐 건국대 교수로 옮겼다. LCD 연구 분야 권위자로 꼽힌다.
전 총장은 대학에 대한 대표적 규제로 수도권 대학 입학 정원 제한을 꼽았다. 정부는 수도권으로 인구 집중을 막기 위해 1994년부터 수도권 대학은 입학 정원을 못 늘리게 막고 있다. 최근 정부가 반도체 인력 공급을 위해 대학 입학 정원 확대를 검토하자 지방대들은 지방대 정원만 늘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전 총장은 이에 대해 “교육부가 이번에도 지방대 사정을 고려해 수도권 대학은 정원을 안 늘린다는 소문도 들리는데, 그것은 오히려 수도권 대학에 대한 역차별”이라면서 “경쟁력 있는 수도권 대학들의 정원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총장은 14년간 이어온 ‘등록금 동결’ 정책으로 고등교육이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6일 취임한 박순애 교육부 장관은 대학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치솟는 물가 등을 고려해 등록금 동결 정책은 당장 폐지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 총장은 “대학들은 재정이 부족해 신산업 교육을 할 장비도 못 사고, 능력 있는 교수를 뽑을 수도 없다”면서 “14년째 교수 월급이 동결돼 뛰어난 사람들은 연봉 3~5배 주는 기업에 다 간다.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학생들이 받아야 할 교육은 ‘저렴한 교육’이 아니라 ‘질 좋은 교육’”이라면서 “학원비보다 싼 대학 등록금으로는 그런 교육을 할 수가 없다. 학부모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합리적인 선에서 단계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학과나 전공을 신설하는 데 절차가 복잡한 것도 산업 변화에 대학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는 한 이유로 꼽힌다. 전 총장은 “지금은 교육과정을 만들고 교육부 승인을 받아 실제 개설하는 데 2년씩 걸리는데, 산업 현장은 워낙 빨리 변하기 때문에 겨우 개설 승인 받으면 쓸모없어져버리는 일이 생긴다”면서 “사회적 요구가 있을 때 대학이 빨리 대응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건국대는 첨단 산업 중에서도 AR·VR·메타버스 등 ‘실감미디어’ 분야 교육·연구에 강점을 갖고 있다. 지난해 7개 대학이 함께 실감미디어 분야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온라인으로 같이 수업을 듣는 ‘혁신공유대학’을 만들었는데, 건국대가 주관 대학이다. 전 총장은 “지금은 한국 학생들만 수업을 공유하는데, 앞으로 외국 대학 학생들도 수업을 공유하는 글로벌 공유 대학으로 키울 예정”이라고 했다. 공유 대학의 온라인 수업에도 실감 미디어를 활용할 계획이다. 예컨대, 담당 교수 대신 유명 인사가 3D 영상으로 등장해 수업을 진행하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철학 수업에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 등장해 가르치는 식이다. 전 총장은 “자기 대학 교수가 수업하지 않으면 거부감을 갖는 학생들도 더 친근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총장은 학령 인구 감소에 대비해 외국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외국인을 주 타깃으로 하는 ‘국제대학원’을 이르면 내년 설립할 계획이다. 우리가 강점을 갖고 있는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분야와 K팝 등을 전공으로 하고, 수업은 대부분 영어로 한다.
반도체, AI(인공지능), 자율주행, 바이오 등 첨단 산업 분야 융합 연구를 하는 ‘미래기술연구소’를 만드는 것도 전 총장의 목표다. 전 총장은 “정부가 유망 분야를 발표하면 따라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미리 유망 분야를 내다보고 준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