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물 당일 배송 서비스 ‘오늘회’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오늘식탁’에서 팀장급으로 일하던 30대 A씨는 지난달 31일 오후 5시쯤 회사 업무 메신저로 공지를 받았다. 9월 1일부로 전 직원 80여 명을 권고사직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2017년 설립된 이 회사는 한때 회원을 75만명 모으기도 했지만 최근까지 추가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A씨는 원래 국내 한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윗선의 지시만 받는 게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환경에서 일하고 싶어 올 초 이 회사로 옮겼다고 했다. 그는 “회사가 사실상 문 닫는 얘기도 갑작스러운데, 각종 수당이나 회사가 약속했던 인센티브도 못 받은 상태”라고 말했다.
최근 3~4년 새 스타트업은 개인 생활을 존중하는 자유로운 업무 분위기와 수평적인 사내 문화를 갖추고 있어 20~30대 청년이 선망하는 직장 중 하나였다. 스톡옵션을 받는 경우 회사가 성장하면 소위 말하는 금전적으로 ‘대박’을 노릴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글로벌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가 빠르게 줄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문을 닫거나 직원을 감축하는 회사가 속속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상당수 신생 스타트업은 초기 투자금으로 직원을 채용하고 서비스를 개발한 후 적자를 보더라도 고객 수와 매출을 늘린다. 그다음 더 큰 규모의 투자를 유치해 회사 몸집을 키워가는 것이 일반적인 성장 공식이었다. 하지만 불황으로 이 공식이 무너졌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2020년 1분기(1~3월) 약 1조2000억원이었던 스타트업 투자금은 지난해 4분기 2조4209억원까지 늘었다. 하지만 올해 기세가 꺾이면서 2분기 연속 감소세로 돌아섰다.
적자인 상황에서 투자 유치가 안 되니, 직원 월급 주기가 어려워진 곳이 생겨나고 있다. 국내 게임사 ‘베스파’도 지난 6월 30일 직원 105명 전원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했다. 지난 4월 내놓은 신작 게임이 흥행에 실패한 데다, 투자 유치도 무산되며 직원 월급조차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한 유명 배달 대행 서비스 운영회사도 최근 투자를 유치하지 못하고 있어 ‘권고사직을 받을지 모른다’는 얘기가 돌아 회사 안팎의 분위기가 흉흉한 것으로 전해졌다. 2금융권에서 단기 대출을 받은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 일대의 한 IT 스타트업 회사에 다니던 김모(26)씨도 지난 7월 중순 직원 회의에서 사실상 해고를 통보받았다. 추진 중이던 투자 유치가 결국 무산되면서, 사측이 20여 명의 직원 중 절반쯤에게 한 달 안에 사직서를 내라고 했다고 한다. 입사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김씨는 “기술 경쟁력이 있는 회사라고 생각해서 열심히만 하면 나도 좋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하다”고 했다. 강남의 또 다른 IT 스타트업에 다니던 이모(27)씨도 최근 사직을 권고받고, 대기업 입사를 목표로 하는 취업준비생이 됐다. 그는 “자유롭고 수평적인 업무 분위기에 매료돼 스타트업에 들어왔었는데, 이런 회사가 보기 좋아도 외부 변화에 얼마나 약한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대기업으로 이직하겠다는 직원들도 속속 생기고 있다. 테헤란로에 있는 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양모(26)씨도 지난 7월 대기업으로 직장을 옮겼다. 양씨는 스타트업에서 2년 넘게 일하며 스톡옵션을 줄 테니 나가지 말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회사가 투자 유치를 제때 못하는 점을 보고 이직을 결심했다. 양씨는 “예전 동료들이 요즘 권고사직 얘기가 나올까 떨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빠르게 대기업으로 이직한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