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와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심야나 공휴일에 갑자기 아이가 아파 급히 진료를 받으려 해도 병원을 찾기가 어려워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최근 크게 늘었다. 병원에 소아과 전문의가 부족해 응급실에 소아과 의료진이 상주할 수 없는 곳이 많아져서다. 본지가 서울 시내 10대 종합병원의 응급실 현황을 조사한 결과, 소아 환자가 왔을 때 진료를 온전히 볼 수 있는 경우는 이 중 6곳에 불과했다. 일부 대학병원은 밤 12시가 넘으면 소아 환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거나, 심정지 등 정말 위중한 상황에만 소아 환자를 받는 등 아이들 상태에 따라 그때그때 진료 여부를 결정하는 곳도 있었다.

심야·휴일 서울 주요 상급종합병원의 어린이·유아 응급 진료 현황

서울 외 지역도 마찬가지다. 전국 응급실 현황을 볼 수 있는 응급종합상황포털에 따르면, 수도권의 안산·평택·오산·의왕시는 휴일이나 야간에 아이를 진료해주는 응급실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휴일이나 밤 늦게 문을 여는 어린이 병원이 없는 한 아이 부모들은 응급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지역까지 ‘응급실 원정’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 노원구에서 23개월 아들을 키우는 최모(38)씨는 최근 아이가 밤에 손목을 심하게 접질리는 바람에 응급실을 찾느라 밤새 병원 세 곳을 돌아야 했다. 아이가 소파 위에서 놀다 바닥에 떨어졌는데 손목 근처가 심하게 부풀어 올라서다. 급한 마음에 한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지만 “소아과 전문의가 없어 진료가 어렵다”고 했다. 두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도 같은 대답을 들었다. 결국 119에 전화해 진료 가능한 병원을 찾았다. 최씨는 “이런 일을 겪으니 우리나라가 의료 강국 맞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가뜩이나 동네 소아과는 야간에 문을 여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응급실까지 공휴일은 물론이고 평일 야간에도 소아 진료를 보지 않는 곳이 늘면서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마음을 졸이고 있다. 서울의 경우 한양대병원은 오후 5시부터 오전 9시까지는 소아 환자를 받지 않고 있으며, 공휴일은 진료가 불가능하다. 중앙대병원도 밤 12시 이후엔 소아 환자를 받지 않는다. 노원 을지대병원은 24개월 미만 소아 진료를 하지 않는다.

비수도권도 비슷하다. 부산에서도 인제대 부산백병원은 소아 환자 중 단순 복통 같은 진료만 가능하고, 부산동아대병원은 평일 오후 6시~오전 7시와 공휴일에는 소아 환자 진료가 불가능하다. 대구에서도 경북대병원과 영남대병원 등 대형 대학병원 응급실 5곳 중 3곳에서 소아과 진료가 제한되고 있다.

게다가 한밤 유아, 어린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달빛어린이병원’은 전국 20곳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 중앙응급의료센터가 운영하는데, 그마저도 평일엔 밤 12시, 공휴일은 오후 6시까지만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최근 환절기로 코로나와 독감이 동시 유행하는 상황이 되면서 응급 진료 공백 문제는 더 커지고 있다. 갑자기 열이 나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소아 응급실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데다 별도 소아 격리 공간이 없는 응급실에서는 코로나 확산 우려로 열이 나는 아이의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진료를 받으려면 코로나 음성 확인서가 있어야 한다. 동작구에서 10개월 딸을 키우는 김모(35)씨는 지난 추석 때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다섯 곳에서 진료를 못 해준다는 말을 들었다. 김씨는 “한시가 급한데 코로나 음성 확인서를 어떻게 구하느냐”고 했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한 전문의는 “너무 급해서 응급실 밖에서 아이를 진료한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의료계에서는 소아과 인기가 떨어져 전공의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소아과 전공의 지원율은 2018년 101%였지만 2019년 94.2%로 처음으로 미달됐고, 2022년엔 28.1%까지 떨어졌다. 박수현 의협 홍보이사는 “출산율이 계속 줄어드는 데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개인 소아과 병원들이 폐업을 많이 했다”면서 “거기다 업무 강도도 높아 의대에서 소아과를 전공으로 고르는 사람이 적다”고 했다.

자구책 마련에 나선 부모도 많다. 자기 동네에서 그나마 가까운 지역에서 소아 응급 진료를 하는 병원 목록을 만들어 공유하는 식이다. 실제 지난 추석 연휴 4일(9~12일) 동안 한 유명 맘카페에는 “아이가 급하게 병원에 가야 하는데 연휴라 근처 병원들이 많이 문을 닫았다”며 병원을 찾는다는 글이 30여 건 잇따라 올라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