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재현의 형사판] 형사법 전문가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박사와 함께하는 사건 되짚어 보기. 이번 주 독자들의 관심을 끈 사건에 관해 전문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 단계 더 들어가 분석합니다.
아동·청소년 9명을 협박해 강제로 성 관련 영상물을 제작하고 이를 유포한 ‘제2 n번방 사건’의 주범 ‘엘(L)’이 호주에서 붙잡혔습니다. 20대 중반의 한국 국적 남성 ‘엘’은 2020년 12월 말부터 지난 8월까지 성착취 영상과 사진 1200여 개를 제작하고 이를 텔레그램 등을 통해 유포한 혐의를 받는데요. 호주에서 벌어진 한국인의 범죄, 한국에서 처벌받게 할 방법은 없는 걸까요?
◇엘을 체포할 때 한국 경찰도 함께 있었는데, 왜 그를 데리고 오지 못한 건가요?
엘은 한국인이지만, 2010년부터 호주에서 살았습니다. 호주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국민의 범죄 관할은 호주에 있습니다. 일단 호주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경찰이 ‘엘’ 체포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한민국 국민은 전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대한민국의 법을 적용받습니다. 대마초 흡연이 가능한 나라라고 해도 우리나라 국민이 대마초를 피우면 처벌받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엘’은 우리나라의 청소년보호법 제11조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의 제작·배포 등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해 대한민국 경찰은 호주 연방 경찰과 함께 ‘인버로크(inverloch·체포 작전명)’에 참여했습니다.
◇그럼 ‘엘’은 한국에서 재판받을 수 있는 건가요?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범죄자가 대한민국 국민이고, 피해자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을 강조해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호주 현지에서 호주 연방법을 위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범죄인 인도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외국인이 그 나라 동포를 대상으로 중범죄를 행했을 때 대한민국 정부도 범죄인 인도 요청을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한국에서 처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엘’이 호주 법정에서 형을 확정받으면 호주 정부에 ‘형집행정지’를 요청해 우리나라 법원에서 재판한 뒤 다시 호주로 돌려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과거 한국에서 강도살인죄를 저지른 피의자가 태국으로 도망갔던 사건을 자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해당 피의자는 태국에서 또다른 범죄를 저질러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범죄인 인도는 피의자가 태국 교도소에서 형기를 다 채운 뒤 가능했는데요, 당시 법무부는 태국 정부에 형집행정지를 요청해 국내로 송환 후 강도살인죄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엘’이 호주에서 재판받으면, 한국에서도 같은 범죄로 재판할 수 있나요?
대한민국 형법 제7조에서는 ‘죄를 지어 외국에서 형이 전부 또는 일부가 집행된 사람에 대해서는 그 집행된 형의 전부 또는 일부를 선고하는 형에 산입한다’고 규정합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외국에서 형사처벌의 확정판결을 받았더라도 그 외국 판결은 우리나라 법원을 기속할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기판력도 없어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형법 제7조의 의미는 피고인이 동일한 행위에 관해 우리나라 형벌 법규에 따라 다시 처벌받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실질적인 불이익을 완화하려는 것”이라고 판시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엘’이 호주에서 처벌받았다 할지라도 동일한 행위에 대해 우리나라 법원에서 다시 재판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호주에서 받은 형은 우리나라 법원에서 받은 형에 산입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엘’이 호주에서 징역 15년형을 받아 형기를 마치고 대한민국으로 추방된 이후 대한민국 법원이 ‘엘’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면 그는 나머지 15년만 형을 살면 됩니다.
◇그럼 앞으로 한국의 수사당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먼저, ‘엘’을 특정하기 위해 해외 서버에 140여 차례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한 대한민국 경찰에 경의를 표합니다. 인터넷에서 청소년의 미래와 인격을 지운 악독하고 악랄한 행위를 한 ‘엘’과 그 일당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필요합니다. ‘엘’과 관련자들은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처럼 범죄집단 조직죄를 적용해야 합니다. 또한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국내 송환을 추진해 재판한 후 호주로 돌려보내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